살인자, 마녀 또는 아그네스

013 프롤로그
015 살인자, 마녀 또는 아그네스
500 에필로그
503 이야기가 끝난 후에

나는 내가 가장 사랑한 사람에게 최악이 되었노라. ―『락스다일라 사가』

우리 모두가 촛불처럼 느껴진다. 기름 냄새를 풍기며 어둠과 바람 속에서 펄럭이는 촛불. 고요한 방 안에서 발소리가 들린다. 나를 훅 불어 끄려고, 내 생명을 회색 연기로 날려버리려고 오는 섬뜩한 발소리가. 나는 공기 속으로, 어둠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불빛만 남을 때까지 우리를 하나하나 차례로 불어 끌 것이다. 그때 나는 어디에 있을까?

가끔 내가 이미 죽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둠 속에서, 침묵 속에서, 맑은 공기의 냄새를 잊을 만큼 불결한 방에서 이렇게 하염없이 기다리는 일을 사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 나는 눈을 감고 길고 긴 여름날의 계곡을 상상해본다. 태양이 땅의 뼈들을 따뜻하게 데워 마침내 백조들이 호수로 날아들고, 구름 뒤에서 나타난 하늘이 너무도 높고 푸르러서 울음이 터질 것만 같은 그 시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