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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근현대사 > 일제치하/항일시대
· ISBN : 9788957753293
· 쪽수 : 264쪽
· 출판일 : 2024-12-25
책 소개
한민족의 주권을 빼앗은 일본 대륙침공의 상징 이토 히로부미를, 나라의 쇠망을 통감하여 의병을 일으킨 구국의 영웅 대한의병군 참모중장 안중근에 의해 1909년 10월 하얼빈역에서 저격하였다.
당시 여순 관동도독부 육군 헌병 상등병으로서, 안중근의 의거 소식을 듣고 분노와 증오를 느꼈던 치바 토시치가 수감과 재판, 사형에 이르기까지 당당하게 시종일관 동양 평화를 깨트린 일본의 침략과 의거의 정당성을 주장한 안 의사의 인격에 감동, 처형 당일 받은 유묵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을 간직하여 평생 향을 사르며 안 의사의 명복을 빌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이 책은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전후 한국이 처한 국제적 국내적 배경과 상황을 상세히 말하고 있다.
비록 일본 헌병이었지만 만부득이한 의거를 결행한 조선 젊은이의 당당한 행동은 한 일본 간수를 감동시키고 평생을 모시게 만든다.
-이토 히로부미를 응징한 안중근을 여순형무소에서 만나 한평생 공양한 일본 헌병 여순형무소 간수치바 토시치 이야기
-우리에게 공개되지 않은 역사의 진실을 밝힌 책!
-아사히신문, 산케이신문, 각종 방송 및 언론 매체에 절찬되었던 바로 그 책!
이 책은 1909년 10월 26일 9시 30분경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건이 있은 지 일주일 뒤인 11월 3일 이후부터 재판을 받고 처형되기까지 5개월간 여순형무소에 안중근이 수감되었을 때 간수였던 치바 토시치와의 이야기를 쓴 넌픽션이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저격하기까지의 상황과 재판과정, 한국의 독립운동과 1910년 전후 국제적 국내적 상황도 상세하게 이 책에서는 적고 있다.
당시 일본 헌병이었던 치바 토시치의 나이는 24세였다. 그는 11월 3일 이후 마지막 날까지 안중근의 곁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이였다. 검찰관의 취조 과정과 재판 과정을 지켜본 것은 물론 형무소에서도 간수로서 같이 지냈다. 그러는 사이에 남몰래 안중근을 존경하게 된 치바는 마음 깊은 곳에서 ‘안중근을 잃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분명 한국의 미래를 위해 한몫할 인물인데……’라고 아쉬워했다. 그리고 안중근이 처형된 3년 뒤인 1913년 3월 20일 기츠보와 결혼했다. 당시 치바의 나이는 28세, 기츠보는 21세였다. 그 후 요노츠네 소학교 출신자로서는 최고의 지휘인 헌병특무조장까지 진급했으나 뜻한 바가 있어 군에서 퇴역하고 한국 통감부 경찰관으로 전직한 뒤, 마지막 임지인 연해주와 가까운 한국 북부의 함경도에서 경부보로 퇴관했다. 1921년 4월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아내와 생가 근처에 집을 마련하고 여생을 보냈다.
치바는 남은 여생을 보내면서 안중근을 위해 남몰래 참회의 불공을 올렸다. 여순형무소에서 안중근이 써준 글씨인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을 대림사에 모시고 향을 피웠다. 그런 그의 행동은 당시의 일본인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치바는 안중근을 위해 불공을 드리는 것을 하루의 일과로 삼았다. 죽음을 앞둔 치바는 아내에게 안중근의 유묵을 잘 보존할 것과 안중근이 영락정토로 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불공을 드려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치바의 아내 기츠보도 죽고 나자 치바의 친족들은 그의 뜻을 이어 안중근의 유묵을 70년간 소중히 보관해 왔다. 서울에서 안중근 의사 탄신 백주년 기념식이 거행된다는 것을 전해들은 치바의 유족들은, 한국의 발전을 기원하면서 1979년 늦가을에 유묵을 안중근의 고국에 반환하였다. 그리고 2년 후인 1981년 3월 26일 미야기현 구리하라군에 있는 대림사에는 비석이 세워졌다. 이 비석에는 안중근과 치바의 우정을 기념하고 아울러 불행했던 한일병합 35년간의 일제의 탄압지배에 대한 속죄가 담겨 있다.
목차
연보
기원의 날들
어린 시절
불타는 대륙
일본의 원훈, 이토 히로부미 쓰러지다
두 사람의 만남
빗속의 처형식
조국으로 돌아간 유묵
저자 후기
증보판을 내며
역자 후기
책속에서
1904년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해외망명을 결심, 산둥을 거쳐 상해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지면이 있는 프랑스인 신부에게 ‘국내에서 교육 등 실력양성을 통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충고를 듣고 다음 해에 귀국하였다. 1906년 3월에 진남포 용정동으로 이사하여 석탄상회를 경영하다가 정리한 뒤 서양식 건물을 지어 삼흥학교를 설립하였다. 곧이어 남포의 돈의학교를 인수하여 학교경영에 전념하였다.
- <연보>에서
치바가 기억하고 있는 ‘그날’은 바로 1909년 10월 26일이었다. 이날 오전 9시 만주(현 중국 동북부)의 하얼빈역에 도착한 일본의 원훈, 추밀원(樞密院, 일본 구 헌법에서 천황의 정치자문기관) 의장 이토 히로부미는 마중 나온 러시아 재무장관과 30분가량 회담을 나눈 뒤 환영식장으로 향했다. 역구내의 플랫폼에서 러시아군 의장대를 사열하고, 각국의 외교단과 인사를 마치고 곧이어 하얼빈 재류 일본인 환영단 쪽으로 걸음을 옮길 때였다.
러시아 군대의 후방에서 다가온 신식 머리에 양복을 입은 한 청년이 불과 4미터 밖의 가까운 거리에서 이토를 향해 잇달아 총탄을 발사했다. 꼬리를 물고 울려 퍼지는 금속음과 함께 이토의 발길이 멈추는가 싶더니 이내 무너지듯 쓰러졌다.
-<기원의 날들>에서
같은 무렵 일본에서는 1877년에 있었던 서남전쟁에서 메이지유신에 큰 공을 쌓았던 사이고 타카모리가 전투에 패배하여 사망했고, 역시 유신정부에서 가장 개혁적이며 정한론을 반대하던 키도 타카요시도 사망했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유신정부의 중심인물로서 정한론에 반대하던 오쿠보 도시미치 역시 사망했다. 이와 같이 명치유신을 감행하는데 지도적 역할을 수행한 세 사람의 잇달은 죽음은 유신정부의 수뇌부 구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키도 타카요시를 모시던 죠슈번(長州藩)의 하급무사인 이토 히로부미와 같은 인물들이 그들을 대신해 신정부의 지도자로 대두되었다.
‘강화도조약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된 유신 일본의 조선 진출공세는 1895년의 청일전쟁이 종결될 때까지 강제적으로 추진되었다. 약 20년간 조선의 정치정세는 망국적 당파싸움에 휩싸여 있었고, 이를 계기로 일본과 청국은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노골적인 다툼을 시작했다.
- <어린 시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