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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58242604
· 쪽수 : 206쪽
· 출판일 : 2014-07-18
책 소개
목차
이승의 한 생
옴마
큰산자락
봄날은 간다
인생
맨손 체조
저자소개
책속에서
바람의 일렁임도 없는데 고색창연한 단청지붕의 모서리에 매달린 풍경이 운다. 보석알이 부딪치면 저런 소리를 낼까 싶은 청명한 울림이 귓속을 간지럽힌다. 아니다, 예리한 금속의 입자들이 서로 스치며 재그러운 소리로 형성되어 심장 깊숙이 파고드는 것 같다. 아프다. 산사의 적요함이 죽음처럼 깊어져서 일상의 풍경소리가 미묘한 울림으로 다가드는 것인가 쇠봉 노인은 헤아려 본다. (중략)
쇠봉은 고개를 쳐든 김에 손가락으로 코를 횅 풀곤, 두 팔을 쫙 뻗어 헤엄을 치기 시작한다. 스님이 쇠봉의 턱짓을 따라 서낭나무 켠으로 얼굴을 돌리다가 고개를 주억거린다.
“네가…, 천 무당의 손자로구나… 집 나간 네 엄니는 돌아왔냐?”
쇠봉이 들은 척도 않는다. 그러자 스님이 말을 이었다.
“꼬마야, 너, 갈 데 없으면 중산리 무영사(無影寺)로 오너라. 내가 네 머리 깎아주고 거두어 줄 테니… 가만, 네 이름이 뭐라 했더라?”
쇠봉이는 여전히 들은 척도 아니하고 개헤엄만 친다. 스님은 다시 …. (‘이승의 한 생(生)’ 중에서)
그는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집으로 향했다. 간병인이 주말 가까이 들른다니 수요일이면 노모의 몸이 많이 더럽혀져 있을 것 같아 이날은 자신이 미리 목욕을 시키고 싶어서였다.
현관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 아이들이 귀가할 시간도 아니어서 간병인이 앞당겨 들렀나 보다 생각하며 거실로 들어섰다.
욕실에서 기이한 신음소리가 났다. 짐승 울음 같기도 하고 비명 같기도 했다. 노모가 소파 구석에 없었다. 불길한 예감에 반사적으로 욕실 문 앞으로 내달았다. 그런데, 찢어지는 소리가 안에서 터지고 있었다.
“왜 처먹어~. 아들 앞에서는 곡기 끊은 듯 죽 몇 숟갈로 내숭 떨고, 왜 밥솥 밥에 숟가락을 찌르는 거야~. 진짜 똥칠갑 할려고 그래~. 매일 문 열어두는데 왜 안 나가~. 나가 없어지란 말이야~. 어디든 없어져버리란 말이야~. 나가라구~.”
둔탁한 소리와 함께 다시 짐승 울음 같은 비명이 터지고 이어 욕실 문이 벌컥 열렸다. 그곳에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아내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발가벗겨져 웅크린 노모의 어깨를 발로 떠밀고 있고, 노모가 두 손을 위로 올려 싹싹 부비고 있었다.
순간, 소스라치게 놀란 아내가 얼른 발을 거두며 반사적으로 욕실 문을 닫으려 했다.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두 눈만 벌려 뜨고 숨을 멈추고 있던 아들이, 아내의 팔을 홱 낚아채 밖으로 끌어내며 양쪽 뺨을 두세 차례 후려쳤다.
“너… 이런 여자였어? 어서… 내 앞에서 꺼져. 내가, 무슨 일 저지를지… 몰라…, 죽고 싶지 않으면… 꺼져!”
… 아들은 부들부들 온몸을 떨며 욕실로 들어가 노모를 끌어안는다. 커다란 소리로 울음을 터뜨린다.
“옴마, 옴마 미안해요~. 울 옴마를… 울 옴마를… 옴마~ 오옴마~ 으흐흐… 으흐흐~”
노모는 조금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들의 얼굴을 바라본다. 얼굴 가득 서려 있던 공포감이 스러지고 있었다. (‘옴마’ 중에서)
“그래, 너의 아버지 옆에는… 내가 있지. 40여년을 싸우며 살아왔어도 밉든 곱든 평생 동지랄까… 긴 세월로 빚어진, 육친만큼 선명한 연민(憐憫)이 있어서… 털어내지 못하는… 털어낼 수 없는, 내가 있는데… 참담하고 적막하게 보내지는 못하지…. 내 정신이 나날이 혼미해지고 삭신이 저리고 아파도, 네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혐오감이 극에 달할 때도 네 아버지를 털어버려야지 하는 마음은 일어나지 않는다. 사랑해서? 글쎄다…. 그건 아닐 게다. 동반의 긴 세월이 빚어 놓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질긴, 육친 같은 밑정이라 할까. 끈끈한 어떤 기운 때문이라 할까…. 완벽한 비유는 아니지만, 그냥 연민이라 이름 붙여 두자. 나는, 네 아버지 보내지 못한다.” (‘인생(人生)’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