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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86644973
· 쪽수 : 522쪽
· 출판일 : 2019-11-20
책 소개
목차
작가의 말
야생
산영
山가시내
산정
개구멍받이
배꽃
연
생명
사망진단서
파종
복하사
내 살점
인생 1
이승의 한 생
옴마
홍점 노인
휴면
선우 여사
인생 2
산신제
큰산자락
봄날은 간다
제삿날
죽음
존엄하게 죽을 권리
명줄
맨손체조
그대 안의 타인들
열외 인생
저자소개
책속에서
숲이 울창한 깊은 골짜기에 음산한 바람이 불어쳐도 대낮의 산속은 쇠돌에게는 조금도 무섭지가 않았다. 아침 해가 솟아오름과 동시에 쇠돌의 생활은 숲속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봄이면 산나물을 꺾고 여름이면 산딸기와 칡뿌리를 캔다. 가을에 접어들면 숨 쉴 틈도 없이 더 바쁘다. 머루와 다래를 따랴, 돌감과 도토리를 주우랴, 송이를 캐랴, 나무를 하랴… 등등의 일들로 그의 작은 몸은 항상 피곤하다. 쇠돌이는 제 이름자도 쓸 줄 모르며 노래도 부를 줄 모른다. 달짝지근한 다래를 한입 가득 물고 흥겨워지면 놈은 ‘찌찌배배, 왱왱…’ 하는 소리를 곧잘 지른다. 아니면 ‘우우… 쾍쾍’ 하는 짐승 울음을 발하기도 한다. 산에서 나서 아홉 해를 산에서 자란 쇠돌은 산이 고향이고 산이 집이다. 다람쥐와 새들과 친구하는 흡사 귀여운 산짐승 같았다.(산영山影 중에서)
싸늘한 밤공기와 달빛이 좋았다. 슬픔과 외로움이 산더미마냥 가슴에 밀려들며 콧속이 찡해졌다. 아버지와 땅을 일구고 다시 살고 싶었다. 조와 감자로 끼니를 때우는 생활이었어도 그땐 얼마나 자유롭고 편안하지 않았던가. 봄이면 산나물과 진달래를 꺾고 여름이면 산딸기, 가을이면 머루 다래 송이를 따러 온통 산에서 뒹굴며 깔깔거리지 않았던가. 온갖 짐승과 새들이 득실거렸어도 그녀의 흉한 얼굴이나 반점을 탓하거나 비웃지 않았다. 산꽃과 산새들과 산과일 속에서 그녀는 불행을 몰랐다. 첩첩산속 움막에서 활달하고 어여쁘기만 했던 것이다. 또점은 사람들이 무섭고 싫었다. 술청에 드나드는 남정네와 고개를 넘나드는 사람들과 홍천댁과 덕호가 무섭고 역겨웠다. 산이 지척에 있어도 집안 일에 몰려 오르지 못했다. 관대함과 자애로움과 침묵으로 깊은 사랑을 주는, 사람이 살지 않는 산속으로 다시 깊숙이 파묻히고 싶었다.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리며 그렇게 혼자 살고 싶었다.(山가시내 중에서)
망부석처럼 규희는 꼿꼿이 서 있었다. 비로소 그녀는 선명히 떠오르는 한가닥의 생각을 잡는다. 자신의 길을 드디어 찾아낸 그녀는, 어서 짐을 꾸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칠여 년을 군림하고 휘청거린 한 교수의 성에서 물찬 제비 같은 날갯짓으로 미련 없이 날아가는 것이다. 참으로 쉽사리 용단은 내려졌다. 누적되어 가끔씩 피를 말리던 회의와 자기혐오감이 광란하듯 또다시 춤을 추었다.(배꽃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