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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문화/문화이론 > 한국학/한국문화 > 근현대한국문화
· ISBN : 9788959060368
· 쪽수 : 256쪽
· 출판일 : 2006-07-14
책 소개
목차
머리말: 쌀은 한국인의 꿈이었다
제1장: '수탈'과 '기아(飢餓)' 속에서(일제강점기까지)
쌀은 귀족들의 전유물 | '도마뱀 기우제'와 임금의 절미 | '하늘 아래 환곡처럼 나쁜 것은 없다' | '쌀값 폭등 또한 개화인가?' | 가마니와 새끼 꼬기는 쌀 수탈의 상징 | 군산의 번영과 미두시장 | 한 숟가락 덜 먹기 운동 | 죽어가는 노인의 마지막 말, '하이뀨(배급)' | '초근목피(草根木皮)가 쌀보다 영양이 높다!'
제2장: 해방의 상징에서 원망의 대상으로(1945∼1949)
풍년기근과 매점매석 속에서 | 미군정의 쌀 공출 | '쌀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 병아리 눈물만큼의 배급 | '굶주린 사람들의 눈에 핏발이 섰다' | 쌀을 매개로 한 미군정의 이간질 | "모든 양곡의 공출을 반대하자" | 피아(彼我)를 구별하는 수단이 된 쌀 | '밀을 수출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제3장: 한국전쟁과 보릿고개 속에서(1950∼1959)
쌀에 대한 넋두리 | '의용군이라도 나가야 밥을 먹을 게 아니냐' | 쌀을 구하기 위한 사생결단의 싸움 | 무주(無酒)·무육(無肉)의 날 | 쌀을 매개로 한 심리전 | 밥 양은 줄일 수 없다 | '똥값'이 된 '쌀값' | '꿀꿀이죽의 추억' | 약혼녀와 맞바꾼 쌀 세 가마 | '하루종일 돌아다녀도 쌀을 못 구하다'
제4장: 절미 운동에서 쥐잡기 운동까지(1960∼1969)
'배고파 못살겠다 쌀을 달라' | '혁명이 쌀 걱정을 덜게 했다' | '분식의 날'과 '밀가루 예찬론' | 쌀로 된 점심밥은 못 판다! | 증산 운동과 희농1호 | 에베레스트보다 더 높은 코리아의 '보릿고개' | 중산층에서 유행처럼 번진 분식 | "보리밥 먹는 사람 방귀 잘 뀌네" | '쥐는 살찌고 사람은 굶는다' | 밥에 존재하는 질서
제5장: 식량파동에서 녹색혁명까지(1970∼1979)
'흰 쌀밥을 식탁에서 몰아냅시다' | 산두쌀과 생계형 범죄 | '통일벼 행정'의 진풍경 | 세계식량파동과 절미 운동의 업그레이드 | 생명력을 잃어가는 절미 운동 | 절구의 부활과 쌀밥 몰래 지어 먹기 | '애국심이라곤 코딱지만큼도 없는 놈' | '기쁘다 쌀 막걸리 나왔네 만백성 맞으라' | 풍년 기근을 안겨주는 통일벼 | 무공해 쌀의 등장
제6장: 현미 열풍에서 칼로스 쌀의 유행까지(1980∼1992)
흉년과 쌀수입 | 외면받는 보리혼식과 식생활 개선 운동 | 현미의 유행과 감자 주식화 계획 | '남아도는 쌀로 정종과 맥주를 빚어라' | 쌀을 매개로 한 구별짓기 | 북한에서 넘어 온 쌀 | 패스트푸드의 공습 | '쌀값 한번 제대로 받아보자!' | 쌀 가공식품의 등장과 통일벼의 종말 | 부유층에서 유행하는 칼로스 쌀
제7장: 시장 개방에서 생존 경쟁까지(1993∼현재)
세계화를 위한 쌀 시장 개방 | "외국 쌀 먹으면 에미 애비 볼라본다" | 브랜드 쌀 1호 풍광수토의 등장 | 세계식량파동과 식용 쌀 수입 | '쌀이 개밥, 소밥, 돼지밥'이 된 세상 | '튀지 않으면 죽는다' | 맞춤 쌀 전문점의 등장 | '농촌을 슬픔으로 바꿔놓고 있다' | '쌀의 혁명' 프로젝트 | 웰빙 열풍으로 부활하는 혼식 | '수입 쌀은 절대 못 들어온다'
맺음말: 유린당하는 한국인의 꿈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농민들은 통일벼 재배에 냉담했다. 농민들의 통일벼 외면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시험재배를 거쳐 1972년 전국으로 확대 보급된 통일벼가 정부의 기대와 달리 일부 지역에서 심각한 실패를 기록한데다 오랫동안 속아만 살아온 농민들이 정부 정책을 불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통일벼의 치명적인 약점은 바로 미질이었다. 통일벼는 일반미인 '아끼바리'에 비해 푸석푸석해 밥맛이 없고 찰기가 적어 한국인들의 입맛에는 맞지 않는다는 불평이 쏟아졌는데, 당시 농촌에서는 "보리밥맛이 통일쌀보다 낫다"는 유행어가 돌 만큼 통일벼의 미질(米質)은 크게 떨어졌다. 이런 세간의 평판에 박정희는 "누가 이걸 맛없다고 그래. 비싼 돈 주고 외국 쌀 사 먹는 처지에 밥맛 따지게 됐어?"라며 통일벼가 밥맛이 없다는 데에 크게 역정을 냈다지만, 전통적으로 맛이 좋은 쌀에 길들여져 있던 한국인들의 식성은 통일벼를 쉬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엔 미질이 문제가 아니었다. 국미느이 대다수가 말 그대로 한이 맺힌 쌀밥을 배불리 먹지 못하던 시절이라, 가장 우선 순위는 '양(量)'이었다. 통일벼 재배를 둘러싸고 정부와 농민 사이에 힘겨루기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 '통일벼 행정'도 강화돼 공무원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농가를 돌며 통일벼를 재배하라고 강요해 들판에서는 공무원들과 농민들이 통일벼 재배를 놓고 논쟁과 몸싸움을 벌이는 진풍경들이 연출됐다. 심지어 통일벼를 심지 않으며 면장이 직접 모판을 갈아엎거나 볍씨 담근 통에 약을 쳐서 싹이 안 나게 하는 일들도 적지 않게 발생했다. - 본문 146~148쪽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