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59135486
· 쪽수 : 280쪽
책 소개
목차
수림
비와 사무리아
검은 눈
죽은 아이는 멀리 간다
나른 보이의 모험
공포가 그 해안가 마을에 거대한 닻을 내리웠다
개나리 산울타리
링고
비그늘 아래로
작가의 말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손으로 귀를 가려도 들리는 소리는 막을 수 없었다. 남자는 자신의 이마 위로 물의 터널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장마도 끝난 마당에, 입추도 지난 마당에, 그 기나긴 터널을 다 지나왔다고 마음을 놓은 참에, 그는 머리 위로 물의 터널이 무너져 다시 한 번 허우적대는 자신을 느꼈다. 살 속에서, 뼈 속에서 다 지나간 줄 알았던 시름 깊은 장마, 슬픈 장마, 수림이 아직도 비를 뿌리고 있었다.
─ 수림
여자는 용기를 내어 다가가 노숙인 앞에 섰다. 노숙인은 눈을 뜨고 있었지만 시선은 약간 하늘을 향한 채로 그녀를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비가 눈두덩에 고이면 눈꺼풀을 깜박여 물방울을 털어냈다. 실성한 게 분명했다. 그녀는 한 발짝 더 가까이 갔다. 비에 맞아서 노숙인 얼굴의 얼룩이 점점이 지워지고 있었다. 군데군데 땟국이 흘러내리고 누런 피부가 드러나고 있었다. 그녀는 우산 아래서 울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가 사무라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자기가 사무라이가 되어 이유도 없이 눈앞의 노숙인을 베어버린 기분이었다. 그녀 자신이 방향을 잘못 잡은 원한이 된 것처럼, 증오가 된 것처럼.
─ 비와 사무라이
남자의 주변엔 벌써 그렇게 된 친구들이 있었다. 걸인이나 다름없이 된 친구들이. 쉰도 되지 않았는데 이혼을 하고 집을 나오고, 파산신청을 하고 뇌졸중을 겪고, 고시원을 전전하는 친구들. 세상은 살면 살수록 더 살기 어려워지고 가난하면 할수록 더 가난해지는 곳이었고, 그도 점점 친구들의 처지를 닮아가고 있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조만간 그리 될 것이었다.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건대, 구태여 자신이 걸인이 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미 남자의 머리 위에서 물의 터널은 무너졌다. 그는 삶의 에너지를 소진해버렸을 뿐 아니라, 도래할 가능성, 미래에의 희망까지 죄다 탕진해버린 것만 같았다. 그러니 그는 죽음이 싫지 않았다. 죽음이란, 비를 피하기 위해 처마 아래 서듯 비그늘 아래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나 다를 바 없었다.
─ 비그늘 아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