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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88960212121
· 쪽수 : 228쪽
· 출판일 : 2014-07-25
책 소개
목차
책을 엮으며 ― 4
바다를 신어 본 적 있다 ― 9
새가 날아간 자리
아버지, 그 결핍과 과잉의 모순 ― 13
2월 ― 19
사과나무 ― 24
시(詩)를 찾아가는 시간(時間) 여행 ― 30
쭈뼛거리다 ― 39
편견 ― 42
웃음 ― 44
등단 무렵 ― 46
나는 이렇게 망했다 ― 49
새가 날아간 자리 ― 56
살아남은 자의 슬픔 ― 60
나는 후루꾸다 ― 64
꿈과 현실에서 자라는 나무 ― 72
대인기피증 ― 76
커피 생각 ― 80
나무 위에 새긴 이름
벌거숭이 임금님을 생각하다 ― 87
단상들 ― 91
유령의 앙갚음, 시의 앙갚음 ― 97
물의 근원적 질문 ― 104
이미지들과 싸우다 ― 115
돈키호테를 만난 적이 있다 ― 124
섬 ― 128
당신이 별자리 지도를 펼쳐 놓을 때 ― 131
내성(內省)을 견디는 붉은 손들 ― 138
개 ― 146
화엄사 기행 ― 152
나에게 쓰는 편지 ― 169
내가 읽는 나의 시 ― 174
산꿩이 우는 저녁
이은규 시인과의 대담 ― 181
허정 평론가와의 대담 ― 202
김참 시인과의 대담 ― 215
저자소개
책속에서
새가 날아간 자리
쌓인 눈 위에 다시 눈이 사나흘이나 내렸다. 먹이를 먹지 못한 참새들이 논둑 주변을 맴돌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방학을 맞은 아이들은 아침 일찍부터 뒷산에 올라가 힘 빠진 꿩이나 토끼를 잡으려고 종일 눈밭을 쏘다녔다. 나도 마침 논둑에서 참새 한 마리를 쫓고 있었다. 한 시간 가까이 여러 논을 뛰어넘으며 참새를 뒤쫓았다. 매운바람이 코끝에 가득 달라붙었지만 새를 쫓아다니는 기분은 여간 재미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마침내 몸을 날리면 단번에 참새를 잡을 수 있는 거리에서 나는 헐떡이며 앉아 있는 참새를 보았다. 몇 번의 심호흡. 나는 참새를 향해 온몸을 던졌다. 서툴고 어린 사냥꾼인 내 손에 참새가 정말 잡힐 거라는 기대도, 준비도 없이 그렇게 몸을 날렸다. 그리고 내가 그 작은 참새를 두 손에 움켜쥐었을 때 내가 얻은 것은 어떤 쾌감이나 성취욕이 아니었다. 기쁨이나 환희의 감정과는 아예 거리가 멀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형체를 알 수 없는 물체를 만졌을 때의 공포 같은 것이었다. 새의 작은 몸통에 그토록 커다랗게 울리는 심장의 고동이 있었을 줄이야. 참새는 전신을 다해 자신의 존재를 내 손아귀에 전달하고 있었다. 나는 알 수 없는 커다란 두려움에 사로잡혀 참새를 그만 놓아 버렸다. 참새는 포르르 맑고 투명한 하늘 속으로 사라져 갔다. 새가 날아간 자리를 나는 한참이나 멍하게 바라보았다.
언젠가 또 그렇게 한 사람을 보내 준 적이 있었다. 첫사랑이었다. 시골 교회에선 크리스마스이브엔 새벽까지 집집을 돌며 찬송가를 불렀다. 하늘엔 달무리가 잔뜩 퍼져 있었다. 사람들 틈에 끼어서 나는 하나도 기쁘지 않은 노래를 불렀다. 내 눈과 마음은 단 한 사람의 것이었다. 그 한 사람의 존재로 인해 삶은 아름다웠고, 그 아름다움의 대가는 혹독했다. 보내지 못한 수백 통의 편지를 태우거나 그 사람의 불 꺼진 창문을 오래 바라보는 일조차 아무 의미가 되지 못했다. 시골집들은 언덕과 들길 사이사이에 불씨처럼 숨어 있었다. 그 작은 집들이 켜 놓은 등불은 환하고 아름다운 지상의 또 다른 별자리였다. 크리스마스엔 누구라도 순한 양이 되어 별들이 은종을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달무리 속으로 순결하고 깨끗한 믿음의 사람들이 둘씩 셋씩 짝을 이루어 흥겹게 걸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속에서 불안함과 흥분, 부끄러움과 갈망에 사로잡힌 채 아무도 모르게 한숨을 쉬고 있었다. 사람들의 기쁨과 넉넉함에 전혀 어울릴 수 없는 존재는 진정 외로운 사람이었다. 평화와 안식으로부터의 소외. 사랑하는 그 사람의 크고 맑은 눈동자 속에 가득 담긴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그 사람은 내게서 자꾸 멀어져 다른 사람에게로 가고 있었으나 나는 그 절망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하늘에선 몇 개의 눈송이가 가볍게 날리고 있었다.
어떤 것도 내 것은 없다. 그것은 처음부터 그냥 있던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고, 그것을 놓아 보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모든 집착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슬픔과 고통을 견뎌 내지 못할 것 같은 어리석은 나를 위한 욕심일 뿐이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새의 날개를 꺾을 순 없다. 깨달음은 절절한 후회 뒤에나 생긴다. 그러니까 삶은 원하는 것보다 늘 한 박자가 늦는다. 간절히 원할수록 멀리 날아가 버린다. 그리고 그것은 내 것이 아니다. 날아가 버린 그는 그 자신의 것이다. 그렇다면 새가 날아간 자리에 무엇이 남을까. 나뭇가지의 작은 떨림. 공기의 촉촉한 파동. 채 내게 와 닿지 못하고 흩어진 새의 온기. 허공을 더듬듯 내밀다가 거두어들이는 떨리는 손. 이제 그 모든 것들이 잦아드는 현의 떨림처럼 제자리를 잡아 갈 때, 문득, 한 해의 마지막인 12월은 와 있고, 공중에선 새의 깃털보다 가벼운 눈송이들이 하나둘 내려와 손등에 앉았다가 금세 녹아 버리는 것이다. 새가 날아간 자리처럼 세상은 한없이 고요하고 눈은 하늘과 들판을 지우고 다시 나를 지워 간다. 12월, 아무것도 남은 게 없으나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눈은 깊으며 또한 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