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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사회과학 > 정치학/외교학/행정학 > 외교정책/외교학
· ISBN : 9788960865433
· 쪽수 : 296쪽
· 출판일 : 2012-06-18
책 소개
목차
프롤로그 한미관계, 그 뒤편의 진실을 찾는 여정
1장 뜻밖의 동맹, 준비 없는 만남
6·25전쟁의 진실: 누가 어떻게 시작했나
미국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오판의 전쟁: 고지전의 내막
가장 추웠던 겨울: 미군 최악의 전사
맥아더는 영웅이었나
6·25, 냉전시대를 열고 전범국가 일본에 면죄부를 주다
한국은 미국의 계획 속에 없었다
미국에게 너무나 불편한 이승만
2장 한국은 버림받을 것을 걱정했고, 미국은 잘못 엮일 것을 염려했다
미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원치 않았다
냉전, 남북 체제 경쟁과 미국
5·16 쿠데타에 미국은 당황하고 북한은 착각했다
미중수교에 놀란 박정희, 발 빼는 미국
카터 쇼크: 한미 정부 최악의 갈등
엄청난 연루 의혹, 보잘 것 없는 영향력
전두환을 어떻게 할 것인가
3장 민족인가 동맹인가: 북미관계와 남북관계의 진실
CIA 출신 미국대사들
미 국무부에서 가장 큰 부서는 한국과
90년대 북핵은 70년대 남핵의 데자뷰, 결론은 달랐다
제네바 협상, 북미 중 누가 배신했나
미국의 영변 원자로 폭격계획 어디까지 갔나
민족인가 동맹인가: 북핵문제를 둘러싼 한미 갈등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의 내막
FTA는 매국인가 애국인가
4장 숙명적 선린과 선택적 동맹, 글로벌 코리아와 한미관계의 미래
그네 같은 미국의 대외정책, 집중력 떨어지는 한반도 정책
한국은 동북아의 일부, 한국만의 미래는 없다
친중은 숙명, 친미는 전략
아프가니스탄에서 영국으로 탈바꿈한 한국의 위상
에필로그 어느 386세대의 미국 대장정을 마무리하며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이 책은 해방 이후 지금까지 우리 사회 최대의 화두이자 논란거리인 한미관계를 풀어보려는 시도이다. 한미관계를 둘러싼 상반된 시각은 한국 내에서 진보와 보수를 가늠하는 커다란 단층선이다. 같은 규모의 자유무역협정도 한국과 EU가 맺는 것보다 한국과 미국이 맺을 때 훨씬 찬반논란이 크다.
단순하게 옮기자면 보수 진영은, ‘미국은 한국의 절대적 수호자이자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준 혈맹이며 그들과의 동맹 속에서만 한국은 발전할 수 있다’는 수혜적 관점으로 대미 관계를 바라본다. 진보 진영은 ‘미국은 분단을 고착화시키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한국을 철저히 이용하고 짓밟는 제국주의 국가로서 한국 사회의 모든 불행의 근원 중 하나’라는 피해자적 관점에서 미국을 규정한다. 양 극단의 이 두 관점은 그러나 공통점을 갖고 있다. “미국은 해방 이후 나름 계획적이고 일관된 정책으로써 한국을 지배 혹은 관리하고 있다”는 ‘계획적 동맹론’ 내지 ‘음모적 지배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프롤로그 ‘한미관계, 그 뒤편의 진실을 찾는 여정’ 중에서
키신저는 한국전쟁의 모든 주체들이 상대방의 전략을 잘못 판단했다고 지적했다. 대표적으로 스탈린과 김일성은 “미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오판했다. 미국은 “중국의 한국전 참전은 중국의 역량을 넘어선 것”이라고 잘못 예측했다. 키신저에 따르면 한국전쟁에서 미국과 중국은 얻은 것과 잃은 것이 모두 있지만 최대의 패배자는 스탈린이었다. 미국은 북한의 침공을 격퇴하고 신생 동맹국을 지켜내는 성과를 거뒀지만, 중국으로 하여금 강대국 미국과 싸워 버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줬다. 중국의 경우는 신생 공산주의 중국의 위상과 군사력, 존재감을 과시하는 계기가 됐고, 아시아 공산주의 운동에 중국의 리더십을 확보하는 성과를 얻었다. 반면 김일성의 남침요구를 승인하고 마오쩌둥의 개입을 재촉했던 스탈린이 아이러니컬하게도 한국전 최대의 패자가 됐다. 스탈린은 한반도 공산통일에도 실패했고, 참전을 통해 중국의 소련 의존도를 높이고 장악력을 높이려는 의도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마오는 스탈린의 속셈과는 달리 한국전을 계기로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에 맞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한국전 종전과 더불어 중소 관계는 더욱 악화됐고 중국은 소련과는 다른 독자적 사회주의 노선을 걷게 됐다. 실제 이후 10년이 지나지 않아 소련은 중국의 주요한 적수가 되었고, 그로부터 다시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동맹의 변화가 발생했다.
-1장 ‘오판의 전쟁: 고지전의 내막’ 중에서
이 같은 주한미군의 철수정책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불안감에는 근거가 있었다.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 빠져 있었던 미국은 북한의 도발에 대한 대응에서 소극적이었다. 특히 1968년 1월 21일 북한의 무장 게릴라들이 청와대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한국은 생포한 게릴라를 조사한 결과 그들의 침투 목적이 박정희 대통령과 주한 미국대사 포터를 암살하기 위한 것임을 밝혀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포터 대사는 미국이 북한에 보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성명을 냈고 오히려 박정희 대통령에게도 한국의 어떤 대북 보복조치도 미국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북한은 1·21 사태 이틀 뒤에 원산항 근처에서 미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를 나포했다. 여든세 명의 미 해군 승무원들이 포로로 잡혀 고문과 구타를 당했지만 미국의 대응은 미온적이었다. 오히려 미국은 ‘평양을 보복 공습하자’는 박정희의 요청을 거절했다. 당시 린든 존슨 대통령은 현재로서는 미국 승무원들의 안전한 귀한이 더 시급한 과제라고 밝혔다. 사건 발생 직후인 그해 2월 사이러스 밴스 국방차관이 푸에블로 나포사건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밝히기 위해 한국에 왔다. 밴스 차관은 “나의 목적은 박정희 대통령과 한국군이 북한에 대한 경솔한 조치를 취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국이 미국과의 충분한 협의 없이 이런 조치를 취할 경우 한미관계는 전반적으로 재평가될 것이다”라고 밝혔다.
-2장 ‘미중수교에 놀란 박정희, 발 빼는 미국’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