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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일본사 > 일본근현대사
· ISBN : 9788963574202
· 쪽수 : 252쪽
· 출판일 : 2015-02-01
책 소개
목차
일러두기
서장 실패한 조직과 인재양성
쇼와 천황의 불만 · 두 개의 커다란 문제 · 정세에 적응하지 못하는 교육
1장 야마가타의 참모본부
1. 반란의 교훈
일본육군의 탄생 · 세이난전쟁의 승리 · 명백히 드러난 결점
2. 야망이 만들어낸 조직
타케바시 사건의 충격 · 정치가 독주하는 위험 · 참모본부의 독립 · 개인의 야망 · 참모본부의 기능 · 전 육군의 통할을 목표로
2장 환상으로 끝난 통합참모본부
1. 육군개혁과 멕켈
대외군비의 시동 · 증세에 의한 군비확장 · 유럽시찰의 숨겨진 목적 · 멕켈의 초빙 · 카츠라가 목표로 한 ‘일등국의 육군 · 코다마와 멕켈의 교류 · 육군분의와 반주류파의 좌천 · 외정이 가능한 기동적 사단
2. 무너져버린 통합참모본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발명 · 각각의 속셈 · 강행된 통합 · 골자가 빠진 조직과 해체
3장 육군대학교와 멕켈
1. 긍지 높은 학사學舍
부족했던 참모 · 참모본부장의 통할 아래로 · 합격률 10%의 난관 · 우대받는 졸업생 · 실무우선의 직능교육 · 1기생의 면면 · 전략 없는 전술교육
2. 멕켈의 공죄
획기적인 실천교육 · 육성되지 못했던 장수
4장 참모본부의 초진初陣-청일전쟁
1. 옥상옥屋上屋의 대본영
제1차 육주해주 논쟁 · 기묘한 현상 · 문관대신의 배제
2. 이토 히로부미의 전쟁지도
대본영 개설과 청일개전 · 정청대작전 구상 · 대본영, 히로시마로 · 야마가타의 폭주 · 활용되지 못한 교훈
3. 연쇄적인 개악
대러시아전의 대비 · 최고기관 ‘원수부 · 부장이 된 육대졸업생 · 제2차 육주해주 논쟁 · 이원화된 대본영 ·‘군사참의원 · 흔들리는 육대교육
5장 의문시된 육대의 가치-러일전쟁
1. 야마가타가 주도하는 대본영
육대 졸업생의 태두 · 원로회의에서의 의사결정 · 정략주도의 개전 · 형식화된 대본영 어전회의
2. 승리에 감춰진 과제
육대 출신의 막료들 · 만주군 총사령부의 파견 · 각군사령관과 참모장 · 여순공략에서 드러난 결함 · 정보경시의 전통 · 개선되지 않은 병참 · 정전략이 일치한 전쟁종결 · 오야마 원수와 코다마 대장
3. 전후의 권력투쟁
테라우치 육상의 권력지향 · 타나카 기이치의 제국국방방침 · 사이온지 총리의 묵살 · 테라우치의 권한 강화 · 선임 대장을 호출 · 조직의 중추에 선 육대 졸업생 · 정치를 배제한 결속 · 방무회의의 한계
6장 충격 속의 어지러운 질주-제1차 세계대전
1. 일본군의 유럽출병문제
대독일 선전포고 · 각국으로부터의 출병요청 · 가능했던 출병
2. 시베리아출병의 실패
남겨진 불신 · 모순으로 가득 찬 국가의사결정조직
3. 제1차 세계대전의 충격
크게 바뀐 전쟁관 · 현상유지파의 반동 · 우가키 군축의 이상과 현실 · 잃어버린 기개 · 흥성한 시대의 끝
4. 시대를 내다보지 못하는 육대
전공과의 도입과 폐지 · 연구부와 전과의 신설 · 결여된 전쟁지도교육
7장 이시하라 간지의 좌절-중일전쟁
1. 이시하라 간지의 참모본부개혁
두 가지 문제 · 북진과 남진 · 기능부진에 빠진 조직 · ‘대결승전’에의 대비 · 육군성에 동지를 얻어 · 1937년 3월의 인사이동
2. 지나사변과 이시하라의 퇴장
경솔한 중국공격 · 참모본부로부터의 추방 · 대본영정부연락회의 · 파탄된 ‘일중협동구상’ · 강경한 정부와 온건한 참모본부
3. 이시하라의 육대비판
독학에 의한 정전략사고 · 현실에 맞지 않는 교육 · 육대교육의 붕괴
8장 조직이 만든 광기-태평양전쟁
1. 환상으로 끝난 일·독·이·소 4국동맹
백지로 돌아간 중국 철수 · 남진의 함정 · 일·독·이 3국동맹의 올가미 · 히틀러의 탄식 · 남진 개시 · 독소개전의 충격 · 광기가 지배한 집단 · 승산도 종결구상도 없는 전쟁
2. 절망적인 조직과 사람
분열되어 있는 전략사상 · 너무 늦은 절대국방권 · 토죠 수상·육상·참모총장 · 방기放棄된 결전
3. 참모본부와 육대의 종언
최후까지 이어진 분규 · 최후의 육대생
맺음말 / 역자후기 / 참고문헌 / 색인
책속에서
대일본제국육군의 기초를 쌓은 것은 초슈번長州藩 출신의 병부대보兵部大輔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郞이다. 오무라는 육군의 건설에 분주했지만, 1869년 9월 오사카를 시찰도중 습격당하여 부상을 입고, 같은 해 11월 세상을 떠난다. 오무라의 유지를 이어 국군의 건설이 진전을 보게 된 것은 유럽 대륙 시찰에서 귀국한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병부소보兵部少輔로, 사이고 츠구미치西鄕從道가 권대승權大丞으로 취임하면서부터였다. 야마가타와 사이고는 프로이센식 군제를 채용하려 했으나, 도입의 토양이 성숙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당분간은 프랑스식 군제를 답습하면서 전환의 시기를 기다렸다. 그 사이에 야마가타와 사이고가 몰두한 것이 정부 직할군의 건설이었다. 야마가타는 사츠마薩摩·초슈·토사土佐의 세 번이 정부에 상납한 보병 9개 대대를 기간으로 약 6,300명의 어친병禦親兵을 편제했다. 어친병의 힘을 배경으로 폐번치현廢藩置縣을 단행한 정부는 동시에, 각 번의 상비병을 폐지했다. 1877년 2월 세이난전쟁西南戰爭이 발발한다. 1873년 정한론征韓論이 배척되자 하야下野한 육군대장陸軍大將 사이고 타카모리西鄕隆盛가 보병 7개 대대를 기간으로 한 13,000명을 이끌고 카고시마鹿兒島에서 출발하여 북상으로 시작된 대규모의 내란이다. 여기에 큐슈 각지의 사족士族들이 합류하였고, 총 병력 3만 명에 달하는 반란군이 쿠마모토성을 포위하였다. 전투는 약 7개월간 계속되었는데, 9월 카고시마의 시로야마城山에서 반란군이 전멸하고 사이고가 자결하여, 반란은 진압되었다.
1888년 10월, 사이고 츠구미치 육군경은 산죠 태정대신에게 육군성에서 참모국을 독립시켜, 참모본부를 설치하고 싶다는 취지로 상신上申한다. 참모국을 독립시켜 참모본부를 설치하는 것은 통수권이 정부의 손에서 떠나 군사조직이 군령과 군정으로 이원화되는 것을 의미하여, 정치와 군사가 분리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평시에 제정되는 국방방침이나 전시의 전쟁지도 양자 모두 가장 중요한 것은 정략과 전략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참모본부의 설치는 명백히 이에 역행하는 것이었다. 1878년 12월 5일, 육군성의 한 국局이었던 참모국은 참모본부로 독립하여 천황 직속의 기관이 되었다. 천황은 태정대신, 육해군경의 자문이 없이도 참모본부의 보좌로 통수권을 친재親裁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통수권은 정부의 손을 떠났다.(1장 야마가타의 참모본부)
1880년 참의 카와무라 스미요시 중장은 해군성에서 독립한 해군참모본부를 설치하여야 한다는 내용의 의견서를 제출했다. 1886년 3월, 육해군 통합의 중앙군령기관으로 통합참모본부가 탄생했다. 그 조직은 황족인 아리스가와노미야 본부장의 밑에 소가 육군중장과 니레 카케노리仁禮景範 해군중장을 본부차장으로 하여, 육군부와 해군부를 병렬하여 둔다는 기구였다.
육군부는 각 감군부·근위·각 진대의 참모부와 육대·군용통신대를 통할하고, 해군부는 각 진수부·각 함대의 참모부를 통할했다. 육해군을 통합하여 용병하기 위한 세계 최초의 이상적인 조직이었다. 1887년 3월 9일 해군참모본부는 해군참모부로서 해군성의 예하로 복귀하였으며, 육군 대·중장을 제국 전군의 참모총장으로 임명하게 되었다. 참모본부는 예전과 같이 육군만의 군령기관이 되었다. 통합은 완전히 해소된 것이다. 이처럼 획기적인 통합참모본부 해체는 권력투쟁에 기인한다. 이후 다시는 육해군의 군령기관이 통합되는 일은 없었다. 그 영향은 컸다. 힘을 얻은 해군은 해군참모본부, 즉 해군군령부를 해군성에서 독립시킨다. 해군의 통수기능도 이원화된 것이다.
그 결과 육해군의 대립은 점점 격렬하게 되어 전략의 통일은 물론 국가전략에서도 서로 반대방향으로 줄다리기를 하게 된다. 육군을 근대군사조직으로 개혁하는 것에는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두뇌인 참모본부의 조직만은 개혁에 역행하고 만 것이다.(2장 환상으로 끝난 통합참모본부)
육대의 전사교육은 작전전투사作戰戰鬪史가 대부분으로, 전쟁이 시대의 진보와 변화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였는가라는 전쟁사의 교육은 경시되었다. 이는 이후 직면할 전쟁이 지금까지와 비슷한 규모의 동질적인 전쟁의 연장선에 있을지, 아니면 규모와 질적으로 크게 변화할 것인가를 고려하지 않게 하는 경향을 초래했다. 이 때문에 육군성에 근무하면서 군비의 건설을 담당하는 자는 과거 전쟁의 연장선상에서 밖에 생각하지 못하여 시대에 뒤떨어진 군비를 건설하게 되는 경향이 있었고, 또한 참모본부에 근무하는 자는 과거의 전쟁을 기준으로 하여 이에 대응하는 국방계획·작전계획을 입안하였다. 예를 들면 제1차 세계대전이 전쟁의 규모와 양상을 크게 변화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러일전쟁 수준의 발상에서 국방계획·작전계획을 세우는데 그치고 만 것이다.
육군대학교 교관에 취임한 멕켈은 제1단계로 전술교육 원리를 강의하고, 제2단계에서 전술의 응용력을 도상전술을 통하여 향상시킨다는 점은 종래의 육대교육과 일치했지만, 도상전술에서 베를린 육군대학교의 교육방법을 취하여 전술의 실행력을 강조했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던 멕켈의 교육에도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었다. 멕켈이 대부대의 운용에서 병참의 중요성을 역설했다고 하지만, 도상전술·현지전술의 교육은 작전계획과 작전지도의 내용이 주체가 되어 병참에 관한 구체적인 설문은 비교적 적었다. 그 때문에 학생들의 병참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여 작전을 주체로 생각하고 병참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결과를 낳았다.
장수의 자질을 연마하기 위한 교육과 치밀한 작업이 요구되는 소장막료의 교육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전술과 막료요무를 핵심으로 하는 실무적 직능교육은 작전·전투를 주된 임무로 하는 사단 이하의 참모에게는 필요한 것이지만, 참모본부와 육군성에서 정치·외교·경제 등과의 조절을 통하여 폭넓은 국방정책을 입안함에는 큰 결함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종류의 교육은 넓은 시야에서 철학적 사고를 행하여 대국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기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국적인 판단에는 사회과학·인문과학적인, 이른바 대학교육이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구미열강에 필적하는 근대적 육군을 조급히 건설하기 위해서는 독일류의 실천적 근대군의 운용을 배우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멕켈을 초청하여 실천적인 전술을 익힌 것은 잘못됨이 없었다. 문제는 러일전쟁에 승리하여 한 단계가 지난 후에도, 소장참모·지휘관을 양성하는 교육 외에 고급참모·지휘관을 양성하는 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교육체계의 발본적인 재검토에 태만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육대와 국방대학, 또는 육대에 일반과정(막료양성)과 고급과정(장수·고급참모양성)을 설치하여 목적에 적합한 교육을 행하였어야 했던 것이다.(3장 육군대학교와 멕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