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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자서전

안중근 의사 자서전

(개정판)

안중근 (지은이)
  |  
종합출판범우
2014-10-10
  |  
13,000원

일반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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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자서전

책 정보

· 제목 : 안중근 의사 자서전 (개정판)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근현대사 > 일제치하/항일시대
· ISBN : 9788963651200
· 쪽수 : 231쪽

책 소개

안중근 의사 자서전. 1909년 10월 26일 오전 안중근 의사는 만주 하얼빈 역에서 아시아 침략의 원흉이자 조선통감부 총독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였다. 이 자서전은 안의사가 뤼쑨감옥에 5개월 동안 투옥되어 있을 당시, 200여 개가 넘는 유묵과 함께 쓰여진 책이다.

목차

▨ 이 책을 읽는 분에게 5

1. 유년시절 9
2. 갑오농민전쟁의 소용돌이 14
3. 천주교에 입교 23
4. 의협청년 시절 32
5. 증인으로 문란한 검사에 항거 39
6. 대한제국의 혼란기 46
7. 을사보호조약의 비분을 삭이며 54
8. 학교를 설립, 인재 양성에 전력 63
9. 북간도에서 독립군 의병장으로 활약 74
10. 풍찬노숙과 기아를 극복 80
11. 이토에 대한 증오심이 불타 거사 계획 88
12. 하얼빈 역두에 일곱 발의 총성 95

□ 부 록 121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 123
인심결합론(人心結合論) 138
안 의사 유묵 소개 141
대한매일신보 게재(1909.11.20~1910.2.20) 기사 147
옥중 서신 176
최후 공판 기록(변론 및 최후진술·판결 언도) 181
의거 전후 기록 212

□ 연 보 225

저자소개

안중근 (지은이)    정보 더보기
본관은 순흥(順興). 황해도 해주 출신. 할아버지는 진해현감 안인수이다. 아버지 진사 안태훈(安泰勳, 安泰勛)과 어머니 조씨(趙氏) 사이의 3남 1녀 중 맏아들이며, 아내는 김아려(金亞麗)이다. 어려서는 안응칠(安應七)로 불렸고 해외생활 중에도 안응칠이라는 이름을 많이 사용해 자(字)가 되었다. 6, 7세 때에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사하였다. 이곳의 아버지가 만든 서당에서 동네 아이들과 함께 사서(四書)와 사기(史記) 등을 읽었다. 또 틈만 나면 화승총을 메고 사냥해 명사수로 이름이 났다. 16세가 되던 1894년, 아버지가 감사(監司)의 요청으로 산포군(山砲軍)주 01)을 조직해 동학군 진압에 나섰을 때 참가하였다.다음 해에 천주교에 입교해 토마스[多默]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한때는 교회의 총대(總代)를 맡았다가 뒤에 만인계(萬人契)주 02)의 채표회사(彩票會社)주 03) 사장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교회 신자들과 함께 만인계의 어려운 일을 해결하는 등 수완을 발휘하였다.1904년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해외 망명을 결심, 산둥[山東]을 거쳐 상해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알고 지내던 프랑스인 신부로부터 교육 등 실력 양성을 통해 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충고를 듣고는 다음 해 귀국하였다.1906년 3월에 진남포 용정동으로 이사해 석탄상회를 경영하였다. 정리한 뒤에는 서양식 건물을 지어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하였다. 곧이어 남포(南浦)의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해 학교 경영에 전념하였다.1907년에는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이 되면서 반일운동을 행동화하였다. 이 해 7월에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자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3, 4개월 뒤에는 노령으로 갔다. 노브키에프스크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 한인청년회 임시사찰이 되었다.이곳에서 이범윤(李範允)을 만나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였고, 엄인섭(嚴仁燮)·김기룡(金起龍) 등 동지를 만나 동포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의병 참가를 권유하였다. 의병지원자가 300여 명이 되자 김두성(金斗星)·이범윤을 총독과 대장으로 추대하고 안중근은 대한의군참모중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무기를 구해 비밀리에 수송하고 군대를 두만강변으로 집결시켰다.1908년 6월에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군사령관이 되어 함경북도 홍의동의 일본군을, 다음으로 경흥의 일본군 정찰대를 공격, 격파하였다. 제3차의 회령전투에서는 5,000여 명의 적을 만나 혈투를 벌였지만 중과부적으로 처참하게 패배하였다.천신만고 끝에 탈출한 뒤 노브키에프스크·하바로프스크를 거쳐 흑룡강의 상류 수천여 리를 다니면서 이상설(李相卨)·이범석(李範奭) 등을 만났다. 노브키에프스크에서는 국민회·일심회(一心會) 등을 조직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해 애국사상 고취와 군사 훈련을 담당하였다.1909년 3월 2일, 노브키에프스크 가리(可里)에서 김기룡·엄인섭·황병길(黃丙吉) 등 12명의 동지가 모여 단지회(斷指會, 일명 단지동맹)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안중근·엄인섭은 침략의 원흉 이토[伊藤博文]를, 김태훈(金泰勳)은 이완용(李完用)의 암살 제거를 단지(斷指)의 피로써 맹세하고 3년 이내에 성사하지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하기로 하였다.9월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원동보(遠東報)』와 『대동공보(大東共報)』의 기사를 통해 이토가 러시아의 대장대신(大藏大臣) 코코프체프(Kokovsev, V.N.)와 하얼빈에서 회견하기 위해 만주에 오는 것을 알았다. 안중근은 우덕순(禹德淳, 일명 禹連後)·조도선(曺道先)·유동하(劉東夏)와 저격 실행책을 모의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1909년 10월 26일, 이토를 태운 특별 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이토는 코코프체프와 약 25분간의 열차 회담을 마치고 차에서 내렸다. 이토가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환영 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안중근은 침착하게 걸어가 이토로 추정되는 사람에게 4발을 쐈다. 다시 이토가 아닐 것을 대비해 주위 일본인에게 3발을 쐈다. 처음 쏜 4발 가운데 3발은 이토, 1발은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도시히코[川上俊彦]의 오른팔을 맞혔다. 이어서 쏜 3발은 비서관 모리타이지로[森泰二郞], 만주철도이사 다나카세이타로[田中淸太郞]를 맞혔다. 1발은 플랫폼에서 발견되었다.러시아 검찰관의 예비 심문에서 한국의용병 참모중장, 나이 31세로 자신을 밝혔다. 거사 동기에 대한 질문을 받자 이토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님을 밝혔다.관동도독부지방법원 원장 마나베[眞鎬十藏]의 주심으로 여섯 차례의 재판을 받았다. 안중근은 자신을 일반 살인피고가 아닌 전쟁포로로 취급하기를 주장하였다. 국내외에서 변호 모금운동이 일어났고 변호를 지원하는 인사들이 여순(旅順)에 도착했으나 허가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일본인 관선 변호사 미즈노[水野吉太郎]와 가마타[鎌田政治]의 변호조차 허가하지 않으려 하였다.재판과정에서의 정연하고 당당한 논술과 태도에 일본인 재판장과 검찰관들도 탄복하였다. 관선 변호인 미즈노는 안중근의 답변 태도에 감복해 “그 범죄의 동기는 오해에서 나왔다고 할지라도 이토를 죽이지 않으면 한국은 독립할 수 없다는 조국에 대한 적성(赤誠)에서 나온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변론하였다.언도 공판은 1910년 2월 14일 오전 10시 30분에 개정되었고 재판장 마나베는 사형을 언도하였다. 죽음을 앞둔 며칠 전 안정근(安定根)·안공근(安恭根) 두 아우에게 “내가 죽거든 시체는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返葬)하지 말라.……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유언하였다.3월 26일 오전 10시, 뤼순감옥(旅顺监狱)의 형장에서 순국하였다. 안중근의 일생은 애국심으로 응집되었으며, 안중근의 행동은 총칼을 앞세운 일제의 폭력적인 침략에 대한 살신의 항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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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이 책을 읽는 분에게]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나라가 주권을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 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큰 뜻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이는 안중근 의사가 뤼쑨(旅順) 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되기 전 두 동생과 홍 신부를 면회한 자리에서 남긴 말이다.
나라가 풍전등화 같은 백척간두에 몰렸을 때, 오직 나라사랑과 구국의 일념으로 국권강탈의 원흉을 쏘아 쓰러뜨린, 안 의사의 용기야말로 우리 민족의 살아있는 자존심이라 할 수 있다.
주변 열강들의 야욕과 그들의 얽키고 설킨 이해관계에 끼어 희생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 시대의 아픔을 좌시하지 않고, 정의를 위해 용감하게 행동으로 맞섰던 그는 유독 의협심이 강하여 불의를 보고는 그냥 지나치지를 못했다.
유년에는 학문보다는 산야를 달리며 사냥에 열중하며 남아의 기상을 길렀고, 성년 이후에는 가산을 털어 기울어져가는 나라의 인재 양성에 뜻을 두고 학교를 세웠으며, 나라의 국권이 완전히 기울었을 때에는 국외로 벗어나 독립을 위한 투쟁과 나라사랑을 외치며 해외동포의 힘을 결집시키는 일에 온 몸을 바쳤다.
지구촌 사람들을 경천동지(驚天動地)케 한 거사의 계획도 많은 시간이나 자금이 소요되지 않은, 어쩌면 천우신조(天佑神助)의 필연적인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안 의사는 법정 진술에서,
“일본국 4천만 민족이 ‘안중근의 날’을 크게 외칠 날이 머지않아 올 것이다. 동양의 평화가 이렇게 깨어지니 백년 비바람이 어느 때에 그치리오.”
했고 또 이어,
“이번 거사는 내가 할 일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는 말을 남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갔다.
서울의 한복판 남산 위에 우뚝 서 있는 의사의 동상과 기념관의 방명록에는 그때의 가해자였던 후손들인 일본인들의 이름이 수두룩이 기재되어 있는 걸로 보아 우리 국민들에게 보다 그들 일본인들에게 더 조용하고 꾸준하게 숭앙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번 펴내는 이 책은 안중근 의사 숭모회가 펴낸 ‘안의사의 자서전’을 바탕으로 하여 다섯 권의 자료를 참고해 많은 부분을 보완했으며, 부록으로 옥중에서 저술한 ‘동양평화론’과, 당시의 재판 상황과 피고들의 동정 등을 게재한 대한매일신보의 기사, 일본인들의 요청으로 남긴 유묵(遺墨), 옥중 서신과 최후 공판 기록, 의거 전후 기록 등을 수록하였다.
우리의 젊은 세대들이 역사인식을 새롭게 하고 나라 사랑이 무엇인지를 자각하며 외국의 그 어느 위인전보다도 애정을 갖고 많이 읽어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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