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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프랑스소설
· ISBN : 9788963707471
· 쪽수 : 260쪽
책 소개
목차
추락
기다림
현존
밤
발견
비평가
절단
파티
목소리
타오르는 불
묘지
시간을 거스르다
예술가
재회
돌아감
글쓰기
구원자
샤먼들
출발
결별
개입
재생
절친한 친구
접붙이기
만남
전시회
이별의 선물
그 후
작가의 말
리뷰
책속에서
나와 이처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란 박사뿐이었다. 아마도 내가 그의 아들을 죽인 독일군의 총알을 내 몸 속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의 아들은 2차 대전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나이 어린 레지스탕스였다. 나는 그의 처형용 기둥인 동시에 그에 대한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살아 있는 기념물이었다. 죽음이 제2의 탄생이라고 굳게 믿는 조르주 란은 지난날 그의 아내가 그랬듯이 내가 그의 아들을 품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한 영혼의 수호자였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하나만은 아니었다.
내가 살아가기를 멈추면, 이 모든 인간의 기억들은 과연 어떻게 될까.
“호주에는 어떤 품종의 난초가 있는데, 그 난초가 피우는 꽃에는 아무 곤충도 관심이 없었어. 그래서 이 난초는 수정하기 위해 한 가지 계략을 꾸며냈지. 말하자면 생식기관을 암컷 말벌의 형태로 만드는가 하면 그 냄새를 모방하기까지 했단다. 그러면 수컷 말벌은 사랑의 밀회를 위해 꽃으로 달려들어 교미를 하려고 애쓰는 거지. 수컷은 아무 성과 없이 다시 떠나지만 본의 아니게 온몸에 꽃가루를 묻히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가짜 말벌들을 수정시키게 되는 거야.”
“괜찮습니다.” 드레퓌스가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자, 행운을 빌겠네.” 늙은 장군이 자신의 고문도구들을 주섬주섬 챙기며 말했다. “내게도 행운을 빌어주게. 접붙인 게 잘되라고.”
옛 도형수는 우리의 고문자가 초가집을 향해 멀어져가는 걸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내 몸통에 이마를 기댄 채 껍질 속에 손톱을 박아넣더니 소리 없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의 모든 슬픔이 나를 뚫고 들어와 심목深木에 도달했다.
모든 것을 석화시킨 그 마음속 고통의 무게, 마음속 비밀의 무게…… 그것은 아마도 나의 가장 무거운 추억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