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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88964475690
· 쪽수 : 352쪽
· 출판일 : 2020-03-30
책 소개
목차
지은이 소개 손원태 박사
머리말 _ 손원태
책을 펴내며 _ 최재영
추천의 글 _ 김찬희
추천의 글 _ 정운현
1장 ╻ 김성주를 처음 만나다
1. 나의 유년시절
2. 아버지 손정도 목사
3. 중국 길림(吉林)
4. 조선인길림소년회
5. 민족의 넋을 생각하다
6. 사진 속에 멈춘 시간
7. 도산 안창호 선생 석방운동
2장 ╻ 추억의 시간과 전설의 시대 ― 김일성 장군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증언
1. 인생의 갈림길
2. 상해 「대공보」에 실린 글
3. 나가사키 감옥에서
4. 인연을 만나다
5.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자
6. 평양으로 가는 길
3장 ╻ 김일성 주석을 다시 만나다
1. “어데 가 있다가 이제야 왔소”
2. 친 형님의 심정
3. 산속의 백악관
4. 민족자주정신의 상징
5. 이민위천(以民爲天)
6. 진정한 애국자
7. 깨끗하고 고상한 나라
8. 변함없는 옛정
9. 대동강의 물결을 따라
4장 ╻ 조국의 화목을 바라며
1. 하늘이 무너지다
2. 평양에서 맞은 팔순
3. 김정일 영도자
4. 영원한 우정을 위하여
부록
손원태는 누구인가
손정도목사기념학술원
리뷰
책속에서
이 책이 나오기까지 그동안 우여곡절이 많았다. 손원태 박사는 이 회고록의 집필을 이미 1996년 12월에 끝냈으며, 가장 먼저 한글판으로 출간하기를 원하셨다. 이를 위해 본 학술원의 고문인 클레어몬트대학교 김찬희 교수를 통해 한국의 여러 출판사를 알아보았으나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반북 정서로 인해 출판이 유보되거나 무산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결국 영문판을 먼저 출판할 수밖에 없었고, 친필 원고가 나온 지 무려 7년 만인 2003년 3월 미국의 McFarland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그러나 손 박사는 그토록 염원하던 한글판의 출간을 보지 못한 채 안타깝게도 그 이듬해에 타계하고 말았다. 그 후 우리 학술원에서 손 박사의 유지를 받들어 한국어판 출간의 기회를 지속적으로 알아보던 중 이번에 도서출판 동연을 통해 출판을 하게 되었다. … (지은이) 손원태 박사의 부친 손정도 목사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2대 의장(국회의장)을 지낸 항일독립 운동가이자 뛰어난 목회자였고, 형님은 해군을 창설한 손원일 제독이며, 두 누님과 막내 누이동생 역시 명망있는 사회 활동가들이 되었다. 이 책에서는 겉으로 보기와 달리 이들이 겪게 되는 파란만장한 가족사가 등장한다. 그러나 손 박사가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부분은 김일성 주석에 관한 객관적인 증언들이다. 그러므로 이 책의 내용적인 구분은 ‘내가 만난 김성주’와 ‘내가 만난 김일성’으로 나눌 수 있겠다. 책의 전반부는 청소년 시절의 저자가 두 살 연상의 김성주(김일성)를 직접 겪었던 내용들을 매우 구체적이고 흥미진진하게 서술하였고, 후반부에는 인생의 노년기를 맞은 저자와 김일성 주석이 60년 만에 재회하면서 겪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_ 손정도목사기념학술원장 최재영 박사의 <책을 펴내며> 중에서
내가 이 글을 쓰기로 결심한 것은 북조선을 방문하여 60여 년 만에 김일성 주석과 상봉하고 미국으로 돌아온 직후였다. 하루는 저녁 무렵에 아내와 함께 오마하의 지식인층들이 자주 모이는 식당을 들렀는데 안면이 있는 교포들이 나를 둘러싸고 북조선에 다녀온 소감을 물어왔다. 때마침 우리 옆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대학생처럼 보이는 청년들도 호기심이 동했는지 슬며시 우리 자리에 끼어들었다. “이 분이 최근에 북조선을 다녀오신 손원태 선생님이세요”라고 어느 교포분이 나를 소개하자 그 젊은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은 남한에서 온 대학생들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길림 시절에 맺어진 김일성 주석과의 우정과 만주에서 벌였던 그의 전설적인 항일 무장투쟁에 대해 그리고 60여 년이라는 긴 세월을 뛰어넘어 팔십 고령에 다시 이어진 우리의 우정에 대해 대략적인 것만 이야기해주었다. 젊은이들은 깜짝 놀라면서 “그래요? 거짓말은 아니겠지요? 우리는 조금도 모르고 있었는데요!”라며 신기해하기도 하고 미심쩍어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민족사를 반 토막밖에, 그것도 태반은 왜곡된 역사를 배우며 자란 젊은이들이었다. 어느 것이 참 역사이고 어느 것이 거짓 역사인지, 무엇이 애국이고 무엇이 매국인지조차 헤아려보지 못하는 세대가 조국 땅에서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 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아마도 이것이 나로 하여금 이 글을 쓰기로 결심하게 만든 가장 직접적인 이유일 것이다.
-지은이 <머리말> 중에서
1927년 2월이라고 기억된다. 도산의 시국대강연은 길림성 밖에 있는 대동공창에서 열렸다.
… 조선 수탈의 첨병이었던 식산은행에 폭탄을 투척하고 자결한 의열단 나석주 의사의 추도식을 겸한 이날의 행사에는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의 거두들을 비롯하여 남북 만주의 독립운동자들과 유지들, 길림에 있던 조선인 상공업자들과 청년 학생들이 대거 집결하여 강연장은 청중으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지금 기억하건대 아버지는 당시 길림을 떠나 액목현에 가계셨던 관계로 이 집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도산 선생의 연설이 시작되자 청중은 숨을 죽이고 경청하였다. 선생은 조선 민족의 장래 문제를 놓고 강연하였는데 우리나라 민족주의 운동의 곡절 많고 쓰라린 실패의 역사를 개괄하고 나서, 우리가 여기서 어떤 교훈을 찾고 어떤 방략을 세워나가야 하겠는가 하고 날카로운 질문을 제기하였다.
… 그런데 이때 뒤쪽에서 웅성웅성하는 소음이 들렸다. 청중들은 못마땅해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당시 어떤 중학생이 연단으로 나가 선생의 연설 탁자 위에 종이쪽지 같은 것을 놓고 내려가던 생각이 난다. 도산 선생은 그것을 펼쳐보더니 한동안 말씀이 없으셨고, 청중도 무슨 일인가 하여 숨을 죽였다. 후에야 알게 된 일인데 그 쪽지는 김성주 형이 도산 선생에게 제출한 의견서였다고 한다. 뒤쪽에 앉았던 일부 청년 학생들에게는 선생의 연설이 불만이었던 것 같다.… 이런 중에 안창호 선생을 비롯한 중도파들은 외세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민족 자체의 실력을 배양하는 방안을 대안으로 내세웠다. 말하자면 당장에 힘이 없으니 장기적으로 힘을 길러 일제와 맞서보자는 것이다. 아버지도 점차 이런 주장으로 기울었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가 액목현에서 벌여놓은 일은 모두 이런 실력배양론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투쟁노선은 당시 청년세대들의 정세 인식과는 맞지 않았다.
후에 우리가 소년회에서 독립운동방략을 놓고 웅변모임을 할 때 이준의 방법이냐, 안중근의 방법이냐, 아니면 안창호의 실력배양론이냐를 놓고 토론을 벌인 적이 있다. 그때 김성주 회장은 “이준의 방법도 아니고 안중근의 방법도 아니며, 실력배양론도 옳지 않다. 산업과 교육을 진흥시켜 조선 민족의 실력을 배양한다고 하는데 나라를 통째로 빼앗긴 조건에서 그것이 실제적으로 가능한가? 소학교 훈도들까지 칼을 차고 일본말 교육을 시키는데 교육은 어떻게 진흥시키고 수력발전소는 어디에다 건설한단 말인가! 또한 외세에 의존하는 것은 망국의 지름길임을 역사가 증명했고, 이준 선생이 피로써 교훈을 남겼는데도 여전히 열강의 원조로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라며 열변을 토하였다. 성주 형은 도산 선생의 강연 때에도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 서면질의를 제기했다고 한다. 그러나 도산 선생은 질의서 내용을 청중에게 알리지 않았고 그에 대한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갑자기 제기된 질문이라 그랬을 수도 있지만 시간적으로도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바로 그 몇 분 후에 경찰이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1장 <김성주를 처음 만나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