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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88964476277
· 쪽수 : 612쪽
책 소개
목차
추천의 글 _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 / 5
추천의 글 _ 박원순 전 서울특별시장 / 7
머리말 _ 최재영 / 11
제1부 ╻ 어린 시절
1장 | 부모(전상수, 이소선)의 만남과 결혼
2장 | 대구 출생과 영아기 시절
3장 | 부산 유아기 시절
4장 | 서울의 초등학교 소년 시절
5장 | 서울 용두동 집을 나온 1년의 가출 생활
6장 | 대구 중등학교 학창 시절
7장 | 대구 남산동에서 고학을 위한 가출 결행
제2부 ╻ 서울 생활
8장 | 대구에서 서울을 향해 뿔뿔이 흩어지는 식구들
9장 | 참담한 서울 생활과 가족들의 상봉
10장 | 또다시 시작된 1년간의 밑바닥 서울 생활
11장 | 평화시장 첫 취업과 서울 남산동 50번지 이주
12장 | 서울대학교 학생들과 ‘만나지 못한 만남’의 인연들
제3부 ╻노동 ‧ 연애 ‧ 신앙 생활
13장 | 서울 남산동 50번지 화재 참극과 다락방교회
14장 | 도봉동 천막촌 공동생활과 천막 교회 설립
15장 | 남상사와 통일사에서 본격적인 미싱기술을 익히다
16장 | 쌍문동 화재민 천막촌으로 이주해 정착하다
17장 | 한미사 재단보조 취업을 통해 노동참상을 겪다
18장 | 오금희에게 사랑의 열병을 앓다
19장 | 일기로 사랑을 말하다
20장 | 시로 실연의 아픔을 달래다
21장 | 검정고시로 대학 진학에 도전하다
22장 | 확고한 기독교 신앙 형성과 교회 헌신
23장 | 자기 이름을 다양하게 개명하다
제4부 ╻ 노동운동에 눈을 뜨다
25장 | 창현교회 건축공사에 헌신하다
26장 | 부친을 통해 근로기준법과 노동운동에 눈을 뜨다
27장 | 평화시장 노조 선배들의 실패를 거울삼다
28장 | 바보회를 조직해 진정 단체로 활동하다
29장 | 자신의 생애 같은 ‘맨발의 청춘’을 노래하다
저자소개
책속에서
어린 태일이 유아기를 보낼 당시에도 할아버지 전암회는 포목상을 했고 아버지 전상수는 옷을 만들어 납품하는 미싱 기술자였을 뿐만 아니라 큰아버지 전영조와 작은아버지 전영관에 이르기까지 집안 어른 모두가 재봉틀과 연관된 직업으로 생계를 이어 갔다. 그런 환경 속에서 자란 전태일은 특히 영아기 시절부터 아버지의 봉제업을 통해 재봉틀로 옷을 만드는 모습을 바라보며 성장한 것이다. 동시에 어느 무렵부터 자신도 아버지의 미싱일을 직접 도와주며 어깨너머로 재봉틀 기술을 배우게 된다. 그러다가 1965년 8월 26일을 기점으로 평화시장 봉제업체에 첫발을 내디딤으로써 재봉틀과의 인연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2장 _ 대구 출생과 영아기 시절> 중에서
장남 태일은 막내 순덕을 집에 남겨 두고 태삼과 순옥을 데리고 이태원 근처 미군 부대에 가서 꿀꿀이죽을 얻어먹으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부모가 모두 다 저 지경이 되었으니 문전걸식을 해서라도 어린 동생들과 살아갈 궁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 처음 당도할 때는 어머니가 문전걸식을 해서 자신들을 먹여 살렸지만 이번에는 반대의 처지가 되었다. 장남 태일이 어머니를 비롯한 온 식구들의 끼니를 직접 책임지게 된 것은 그런대로 괜찮았으나 무엇보다 태일이 견디기 힘든 일은 어머니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치료하는 과정이었다. 태일은 미군 부대 식당 개구멍 옆이나 담벼락에 놓여있는 드럼통에 담긴 꿀꿀이죽을 양동이에 퍼 담아 매일 집으로 가져왔다.
<4장 _ 서울의 초등학교 소년 저절> 중에서
청옥학교는 당시 대구시 교육위원회에 정식인가를 받은 정식 중학교 과정의 야간학교였다. 청옥학교는 전태일의 셋방 앞에 넓은 배추밭을 지나면 바로 학교가 나올 정도로 가까웠다. 집에서 200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청옥학교에 다녔는데 지금은 명덕초등학교 학교 체육관인 명덕관이 지어져 있었다. … …
삼총사는 서로 성격이 잘 맞아 자주 어울리는 친구들이다 보니 매일 붙어 다니다시피 하는 사이가 됐다. 특히 원섭은 아버지가 봉덕동에서 사진관을 운영했기 때문에 낮에는 아버지의 사진관 일을 도와주고 밤에는 청옥학교를 다녔다. 태일과 청옥학교 친구들의 사진이 유난히 많이 남아 있는 이유는 바로 원섭의 아버지가 사진관을 운영한 덕분이었다. 재철은 성격이 워낙 남자답고 껄렁껄렁하고 익살스러워서 별명이 “꽝철”이라고 불려졌고 훗날 서울 전농동으로 이사를 한 재철은 태일의 분신 항거하기 이전까지 수시로 접촉을 하며 우정을 나눴다. 군대 간 친구들이나 청옥학교 친구들이 서울로 올라오기라도 하는 날에는 재철은 태일도 불러내 서로가 어울리며 놀러 다니고 자주 사진도 찍었다.
<6장 _ 대구 중등학교 학창 시절>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