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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65702009
· 쪽수 : 304쪽
· 출판일 : 2014-03-24
책 소개
목차
달의 정령 - 9 / 열꽃 - 15 / 소리의 비상 - 24 / 누구를 위해 소리를 하느냐 - 44 / 죽음보다 깊은 잠 - 49 / 한 많은 늙은 명창 - 54 / 어머니 - 60 / 소리의 맛 - 65 / 산천은 험준하고 - 72 / 장엄하고 웅혼한 소리 - 86 / 악연 - 92 / 하얀 혼령 - 96 / 기생 산호 - 100 / 사랑가 - 104 / 요술 소리통 - 110 / 멈추어버린 시간 - 114 / 바위굴 - 119 / 아우르기 - 122 / 동리(桐里) - 128 / 앞산도 첩첩하고 - 131 / 천사 - 137 / 현해탄 - 141 / 하늘의 소리 - 150 / 걸어 다니는 현금보따리 - 153 / 불편한 녹음 - 158 / 관부연락선 - 163 / 자라와 토끼 - 167 / 방자 임방울 - 174 / 천재의 반란 - 179 / 찬란한 슬픔의 봄 - 186 / 시인 귀명창 - 194 / 박경화 - 203 / 섬진강 은어 바람 - 209 / 선(禪)의 소리, 혹은 곰삭은 수리성 - 213 / 소리의 길 - 221 / 홍매화 - 227 / 처네 - 230 / 박오녜 - 238 / 또 한 여자 - 244 / 소리의 색깔 - 249 / 하늘을 마술같은 비취색으로 칠한다 - 251 / 만고강산 - 256 / 견우와 직녀 - 261 / 체포 - 266 / 무너앉는 하늘 - 281 / 마지막 소리 - 289 / 화해 - 293 / 시원으로의 회귀 - 296
용어 풀이 - 298 / 작가의 말 - 소리의 무지개 혹은 신화의 소리를 찾아서 - 300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아따 오메! 뭔 달이 저리 징그럽게 환하다요?”
남자는 달빛을 징그럽다고 말하는 여자의 몸속으로 흘러들었다. 남자의 숨소리가 갈대숲을 흔들었다. 달과 안개와 갈대숲이 알 수 없는 가락으로 출렁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몸속에서, 형체를 알 수 없는 천둥소리와 지령음(地靈音)이 두리둥둥 두리둥둥 울리고 있었다. 여자의 심연 속에, 멀고 먼 하늘의 달로부터 흘러온 신화 한 자락이 이무기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다.
꿈이었다. 여자는 그 꿈을 접신(接神)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어느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는데, 한 달 뒤부터 입덧을 했고 다음 해 초여름에 여자의 배 속에서 남자 아이가 태어났다. 살갗이 백옥같이 희었고, 얼굴이 달덩이처럼 둥글었고, 응아 하는 고고(呱呱)의 소리가 하늘의 편경을 울려대는 것 같았다. 아기는 젖을 탐했고, 금방 먹고 나서 또 배가 고프다고 두 팔 두 다리를 해작거렸다. 제때에 젖꼭지를 물려주지 않으면 보채며 악을 쓰듯이 소리쳐 울어댔다. 그 울음소리가 하늘의 악기 소리처럼 향 맑았고, 쨍쨍 울리면서 하늘로 치올라가고 멀리멀리 퍼지곤 했다.
불그스레한 꽃송이들이 지천으로 달려 있었다. 꽃송이들을 따서 바가지에 담았다. 열꽃 피는 내 새끼를 위해 이 매화꽃들이 피어났다. 바가지에 꽃송이들이 수북하게 담겼다. 그것을 부엌으로 가지고 갔다. 화덕을 걸고, 그 위에 노구솥 뚜껑을 거꾸로 엎었다. 꽃잎들을 털어 붓고 화덕에 불을 지폈다. 꽃잎들이 향기를 뿜으면서 노릇노릇 볶아졌다. 볶은 것을 절구통에 넣고 절구로 찧었다. 몽근 가루가 되었다. 그 가루를 사발에 담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입을 크게 벌리라고 했다. 그가 입을 벌리자, 매화꽃 가루 한 숟가락을 입 안에 털어 넣어주었다. 따스한 물 사발을 주면서 “꿀렁꿀렁 해갖고 눈 딱 감고 삼켜라.” 하고 말했다. 임방울은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삼켰다. 어머니는 다시 한 숟가락을 먹였다. (중략)
“손님은 매화 향기를 좋아한단다. 그래서 매화꽃이 필 때 오시고, 그 꽃잎 볶은 가루를 드리면 흔쾌히 떠나가신단다.”
어머니는 네모난 상에 정화수를 떠 올렸다. 상을 들어다가 툇마루에 놓고 징을 엎어놓고 두들기면서 비손을 했다. 손님께서 오시기는 했지만, 한사코 조용히 흔적 남기시지 말고 다녀가시라는 비나리였다.
허공은 아득하고 음음한데 하얀 벚꽃 잎 같은 눈송이들이 사뿐사뿐 흘러내리고 있었다. 저세상으로 간 한 많은 혼령들이 눈이 되어 팔랑거리며 내려오고 있었다. 그의 머리에 산호의 얼굴이 그려졌다. 그녀의 혼령이 눈송이가 되어 그에게로 돌아오고 있었다. 꼴머슴을 살던, 아랫마을의 부잣집에서 아기업개 노릇을 하던 삼례의 얼굴을 빼다가 박은 듯싶은 산호였다. 가슴이 뜨거워졌고 수런거렸다. 그 수런거림을 소리로 뿜어내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의 혀는 굳어 있었고, 그의 몸은 무력했다. 살갗이 깡말랐고, 맥이 빠져 있었다. 그는 심호흡을 했다. 삼례로도 보이고, 산호로도 보이는 얼굴이 빙긋 웃으면서 ‘얼른 일어나시오. 소리하러 가게. 나 방울이가 하는 소리를 듣고 싶소.’ 하고 말했다. 꽃잎 같은 눈송이들은 솜덩이처럼 쌓이고 있었다. 눈송이들이 흘러내리는 허공에 또 하나의 세상이 있었다. 세상은 한도 끝도 없이 넓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