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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청소년 > 청소년 문학 > 청소년 소설
· ISBN : 9788965746010
· 쪽수 : 260쪽
· 출판일 : 2016-11-08
책 소개
목차
리뷰
책속에서
눈물을 참느라고 목이 메었다. 그녀는 ‘니같이 이쁜 애가 어째 무당 딸이 됐는지 모르겄다’ 하던 어린 날 정하섭의 말을 생각했다.
“답답하게 그러고 있지 말고 왜 무당이 됐는지 대답 좀 해보시오.”
정하섭이 다그쳤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것이 지 운명이구만요.”
“운명…… 운명…… 운명…….”
정하섭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바람에 날아갔다.
“소화가 무당딸만 아니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정하섭은 그런 말과 함께 손을 덥석 잡았다. 소스라치게 놀라 손을 빼려 했지만 빠지지 않았다.
“우리 둘의 운명도 저 레일 같이 영원히 만나지 못할 거요.”
정하섭이 한참 만에 한 말이었다. 그 말이 돌멩이가 되어 가슴을 쳤다.
-「일출 없는 새벽」 중에서
아들 대치를 향한 체념을 가슴에 심기 시작한 것은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었다. 스무 살에 가까울 때부터였으니까 아들의 행동거지는 일정 때부터 시작해 이미 10년이 가까워 있었다. 일본인 지주에 맞서 소작쟁의를 벌이면서 아들은 가도가도 허기진 소작농군의 길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일반 소작쟁의만도 삭신 녹아내릴 매타작에 콩밥신세인 세상에서, 일본인 지주를 상대로 한 소작쟁의가 어떤 결과를 부를지는 빤한 노릇이었다. 피걸레가 된 아들을 업고 집으로 돌아오며 판석 영감은 제 살이 찢겨나가는 아픔에 떨며 울었고, 대대로 이어진 소작농의 비애와 운명을 씹었다.
“아부지, 목숨 내걸고 독립운동허는 사람들도 있는디, 뺏긴 지 밥그릇 찾아먹는 일도 못헌다면 고것이 무슨 사내새끼다요. 그리고 우리가 허는 짓이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것도 다 알고 있당께요. 그려도 허고 허고 또 혀야지라.”
-「가슴으로 이어진 물줄기」 중에서
“못 믿는 게 아니고, 나는 안 되고 아부님은 괜찮은 게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자네가 알 턱이 없지. 그건 인민이 정하는 기준이니까.”
염상진은 김범우의 손을 뿌리치고 나갔다. 자네한테 이런 말 미리 하는 것은 우정 때문이 아니네. 염상진의 말이 귀에 왕왕왕 울렸다. 우정 때문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 때문인가. 언제라고 한번 자신이 그들의 일을 도운 적이 있었던가. 그런 일은 전혀 없었다. 그와의 교분은 20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 있었고, 자신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그를 형님이라 불렀다. 그런데 그는 굳이 우정 때문이 아니라고 못 박았다. 혁명의 적으로 마땅히 숙청해야 할 사람을 사사로운 정 때문에 피신시킨다는 것은 분명 죄악일 터였다. 그래서 그가 우정 때문이 아님을 강조한 것일까. 그러면 아버지의 안전은 어떻게 보장할 수 있단 말인가. 아버지는 읍내에서 손꼽히는 지주 아닌가. 김범우는 서둘러 안채로 갔다.
“그래…… 상진이가 시키는 대로 니는 얼렁 피해라.”
-「민족의 발견」 중에서
김사용 어른을 인민재판의 단상에 세운 데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지주인 그분을 떳떳하게 보호하고 싶었고, 다른 지주들을 처단하는 데 확실한 기준을 세우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단상에 선 김사용 어른은 예상보다 훨씬 더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분은 창백한 얼굴로 재판이 끝날 때까지 눈을 꼭 감고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런데 그분의 창백한 얼굴 위에 햇빛이 반사되는 느낌을 받았다. 볼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염상진은 한 가닥 전류가 찌르르 가슴을 관통하는 아픔을 느꼈다.
염상진은 어두워진 다음에야 겨우 짬을 내 그분을 찾아갔다.
“자네가 어인 일로…….”
김사용은 말을 얼버무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토록 냉담한 얼굴을 여태껏 본 일이 없었다.
“어르신, 용서하십시오.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
김사용은 단상에 섰을 때처럼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제 입장을 이해해 주십시오.”
“…….”
김사용은 숨도 쉬는 것 같지 않았다. 염상진은 자신이 버려졌음을 느꼈다. 그러나 자신은 그 어른을 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조계산 숯막」 중에서
“의원님은 오늘 도착하셨구만요.”
염상구는 김범우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말마다 의원님이었다. 염상구가 지난 선거 때 최익승의 행동대원으로 설친 것은 김범우도 알고 있었다.
최익승이 벌교에 내려왔다는 말에 김범우는 암담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최익승이 오늘 몇 시에 왔지? 그자가 무슨 일을 했나?”
김범우는 최익승에 대한 역겨움을 애써 누르려 했지만 흔들리는 감정은 두 가지 질문을 한꺼번에 하게 했다.
“긍께, 의원님은 오후 1시쯤 도착허셨는디…….”
국회의원 최익승을 마중나온 10여 명의 사람들은 플랫폼에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그들은 읍내에서 장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거나, 유지들이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 있어야 할 몇몇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세무서장, 금융조합장, 청년단장 그리고 술도가 정현동 사장, 윤 부자 등이었다. 경찰서에 갇혀 있는 정 사장을 뺀 나머지는 이번에 저승객이 된 사람들이었다.
-「이념 이전의 인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