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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65746607
· 쪽수 : 560쪽
책 소개
목차
1권
제1부 하늘의 그물
제2부 모든 죄는 원죄를 반복하고 변주한다
2권
제2부 모든 죄는 원죄를 반복하고 변주한다
제3부 저 여자가 그랬습니다
작가 후기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그 가을의 모든 새벽마다 안개는 무진(霧津)의 바다로부터 육지로 상륙했다. 모든 아침들은 해가 떠오르기 전에 빛을 은폐하는 안개에 둘러싸였다. 안개는 모든 빛을 빛으로부터, 모든 사물을 사물로부터, 모든 풍경을 풍경으로부터 차단했다. 해가 아주 높이 솟아오르고 안개의 입자들이 하나하나 데워져 수증기로 휘발되기까지는 해조차도 제빛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날 새벽안개가 바다로부터 무진으로 상륙을 시작했을 때 그 남자는 어둠 속에 아무렇게나 구겨져 팽개쳐져 있었다. 안개는 마치 이 지상에서는 천적을 가지지 못한 희고 긴 털을 가진 난폭한 짐승처럼, 혹은 오래되고 버려진 식민지에 상륙하는 점령군처럼 산만하고 무례하게 밀려들었다. 그 하얀 털에 점령당하듯 길이 사라지고 건물이 숨을 죽이고 가로등 빛이 힘을 잃었다. 땅에 이어 하늘이 그 거대한 짐승에게 가려지고 나자 세상은 완벽하게 안개의 것이 되었다.
이나는 외롭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많았지만 쓸쓸하다는 생각은 별로 해본 적이 없었다. 외로움이 나이를 먹고 늙으면 쓸쓸함이 되는 걸까? 외로움이란 단어 말고 쓸쓸함이라는 단어에는 세월의 더께 같은 것, 오래되고 쿰쿰하고 약간은 궁상맞은 땀내 같은 것이 배어 있는 듯했다. 엄마는 오늘 밤, 쓸쓸하다고 생각할까. 늘 멀리 있던 딸이 이렇게 곁으로 다가와 거실 건너편 방에 누워 있어도?
이나는 어쨌든 엄마와 함께하는 이 지상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휴가를 좋은 기억으로 채우고 돌아가고 싶었다. 누운 채로 올려다보니 창밖으로 안개가 흰 블라인드처럼 빡빡이 서려 있었다. 아까 잠들 때는 분명 없던 안개였다. 창밖은 우유를 발라놓은 듯이 희뿌옜다. 그제서야 이나는 무진에 돌아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멀리서 종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성당의 종소리였다. 그리고 왜였을까. 이나는 설핏 잠든 엷은 꿈속에서 한 소녀를 만났다. 해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