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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66550906
· 쪽수 : 232쪽
책 소개
목차
작가의 말 / 5
사소한 밤들 / 9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시간 / 33
조용한 생 / 87
당신의 비밀 / 111
마순희 / 137
해피크리닝 / 165
너무 멀리 가지 마 / 193
해설
상처 입은 치유자의 글쓰기(고영직) / 220
저자소개
책속에서
붉은 포엽을 받치고 있는 암녹색의 이파리를 손가락 끝으로 맞비비자 옅은 풀물이 배어 나왔다. 불빛의 각도 때문인지, 건조한 주변 탓인지 꽃집에서 볼 때와는 달리 포인세티아는 이파리 색깔이 흐려 보였다. 당신을 축복합니다, 당신에게 축복을…. 혀끝에 맺히는 말들이 기포처럼 그녀의 입속에서 굴러다녔다.
도전적으로 물음을 던진 이들은 대개, 스스로 먼저 말문을 닫았다.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자기 내부에 답이 있다는 것을. 그들은 그렇다거나 아니라는 단도직입적인 말을 원하는 게 아니라 그 말의 언저리에 널려 있는 자잘한 감정을 드러내고 싶은 건지도 몰랐다. 흔들리는 자신들의 내부를 깊게 들여다봐주기를. 그것이 아무리 쓸데없는 이유와 변명밖엔 안 될지라도 그 말을 들어주고 동조해줄 누군가가 필요한 것이리라.
―「사소한 밤들」 중
재섭은 흰 차선 하나만 그려진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걸었을 것이다. 재섭의 할머니 문상을 갈 때 태경의 차가 덜컹대며 들어갔던 그 길이 포장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낮은 산모퉁이를 돌면 드러나는 분지 같은 들과 들녘에 드문드문 앉은 농가들을, 다시 산모퉁이를 따라 이어지던 좁은 비포장의 길을, 시야가 가로막힌 산굽이를 돌 때마다 눈앞의 풍경이 단절되곤 했던 그 캄캄한 길을 기억한다. 막차가 끊긴 그 길을 걸어가면서 재섭은 몇 번의 절망과 마주쳤을까. 뒤에서 차가 오는 걸 몰랐을까. 알면서도 피하지 않은 걸까. 돌아보지도 않은 채 경사가 가파른 교문 앞에서 사고를 당했을 때 자전거의 바큇살이 허공에서 맹렬하게 돌던 장면을 떠올렸을까? 그때 그에겐 해변까지 찐 옥수수를 머리에 이고 장사를 다니던 허리 굽은 할머니가 있었다. 옥수수 사려, 옥수수 사려. 태경이었나, 종오였나. 장난스럽게 야밤의 찹쌀떡 장수 흉내를 내던 우리들의 시간이 결코 없어진 건 아니었다. 서로의 시간을 살아오면서 우리에게 친구라는 이름 외에 무엇이 더 있었는지 잊고 살았을 뿐. 기껏해야 나누어 가질 건 추억밖에 없어서, 현실에서 추억은 힘이 약해서 서로의 거리가 갈수록 벌어졌던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런 걸 순리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시간」 중
방으로 들어온 당신은 그제야 방의 형광등을 켰다. 당신이 누웠다 빠져나온 이부자리 발치에 여자가 두고 간 편지봉투가 보였다. 당신은 봉투에서 내용물을 꺼내고 텔레비전 옆에 올려뒀던 돋보기를 걸쳤다. 종이를 펼치자 남자 얼굴 사진이 툭 튀어나왔다. 정면을 보고 있는 표정 없는 사진이었다. 사각 얼굴에 눈매와 코, 입 언저리의 선이 뚜렷했고 밤송이처럼 짧게 깎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당신은 어디서 본 듯한 남자를 한참 들여다보다 그 밑에 적혀 있는 굵은 글자들을 읽어 내려갔다. 16세 미만의 여자 청소년을 강제 성추행하여 1년 8개월 형을 살고 출소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밑에 남자의 주거지가 적혀 있었다. 당신이 살고 있는 집과 주소가 같았다.
당신은 우편물을 들고 멍하니 고개를 쳐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집이 흔들리는 게 아니라 당신의 몸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당신은 서랍장 귀퉁이에 몸을 의지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의 비밀」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