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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불교 > 불교의 이해
· ISBN : 9788967980726
· 쪽수 : 768쪽
· 출판일 : 2022-01-28
목차
총론(總論)
1. 중도의 정의 / 20
2. 중도의 연혁 / 31
3. 중도정견(中道正見) / 66
4. 12연기(十二緣起) / 78
5. 진공묘유(眞空妙有)·법계삼관(法界三觀)·일승십현문(一乘十玄門) / 106
6. 사문십의(四門十義) / 120
7. 제법무애도리(諸法無碍道理) / 125
8. 차정(遮情)과 표덕(表德)·삼성공유종(三性空有宗)·대승사구(大乘四句)·설청전수(說聽全收)·심요법문(心要法門)·법성게(法性偈) / 132
9. 유식사상(唯識思想) / 170
10. 논어(論語)에 있는 중용(中庸) / 251
각론(各論)
천태종사상(天台宗思想) / 384
1. 개관(槪觀) / 384
2. 중도실상(中道實相) / 391
3. 원교(圓敎)의 중도설(中道說) / 400
4. 원돈지관(圓頓止觀) / 413
5. 쌍차쌍조(雙遮雙照) / 434
6. 불이법문(不二法門) / 438
화엄종사상(華嚴宗思想) / 445
1. 개관(槪觀) / 445
2. 진공묘유(眞空妙有) / 461
3. 법계삼관(法界三觀) / 469
4. 십현문(十玄門)과 사문십의(四門十義) / 476
5. 제법무애도리(諸法無礙道理) / 502
6. 화엄십종판(華嚴十宗判) / 512
7. 설청전수(說聽全收)·심요법문(心要法門)·법성게(法性偈) / 523
선종사상(禪宗思想) / 537
1. 중도법문(中道法門) / 537
2. 견성(見性)의 본질(本質) / 587
3. 돈오점수(頓悟漸修) 사상 비판 / 659
저자소개
책속에서
1. 중도의 정의
(1) 두 극단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그 가운데도 집착하지 아니한다. 또한 두 극단이 원융하게 통하는 것이다. 집착하면 무엇이나 다 병이다. 이것이 중도의 기초 공식입니다.
(백법 상, 111·172쪽)
(2) ‘두 편견(偏見)을 떠나서[=쌍차(雙遮)하여]’, ‘두 편견이 완전히 융화[=쌍조(雙照)]해야 한다.’ 즉 쌍차쌍조(雙遮雙照)하고 차조(遮照)가 동시(同時)이며 서로 막히거나 걸림이 없이 원융무애(圓融無碍)·원통자재(圓通自在)해야 한다. 여기 차조동시(遮照同時)란 쌍차와 쌍조 사이에 서로 선후가 없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도의 내용이 쌍차쌍조이므로 단순히 쌍차쌍조라 하면 그것이 바로 중도인 것입니다.
그러면 유가(儒家)에서 말하는 중용(中庸)이란 무엇인가? “이 세상에 사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거나 기울어지지(쏠리지) 않고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것(모자라는 것)이 없는 불변의 진리(바른길)를 말합니다.” 통설인 주자(朱子)의 정의인데, 주자(朱熹의 존칭)는 ‘중(中)이란 치우치거나 기울어지지 않고,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용(庸)이란 평상(平常)의 뜻이다’라 하였고, ‘평(平)은 공간적으로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고르고 평범하다는 것이고, 상(常)은 시간적으로 영원 불변하는 진리라는 것’이므로 이를 종합하여 중용의 뜻(義)을 정(定)한 것입니다. 하기는 동서고금을 통한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진리라는 표현 속에 중용의 의미가 함축돼 있습니다.
(명문당 간행, 김학주 역저, 대학·중용, 188·189쪽,
장기근 편저 대학·중용의 명구, 123쪽)
중도와 중용은 같은 진리인가 다른 진리인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불교와 유교의 각 특성에서 나온 이론 구성이나 표현에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실질적인 내용에는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중도나 중용에서 흔히 문제가 되는 두 편견을 예시하겠습니다.
※두 편견의 예:있음(有)과 없음(無), 생(生)함과 멸(滅)함, 괴로움(苦)과 즐거움(樂), 물(水)과 불(火), 선과 악, 옳음(是)과 그름(非), 전쟁과 평화 등이 있으며, 요즘 정당의 노선을 둘러싸고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는 보수와 혁신이 대표적입니다. 그 밖에도 두 편견의 예는 수없이 많은데, 이것을 상대 모순(相對矛盾) 또는 대법(對法)이라 합니다.
① 36대법(對法):육조 혜능(六祖慧能) 대사는 무려 36대법을 예시하였습니다.
㉮ 외경(外境)의 물질세계에 밝음[明]과 어두움[暗] 등의 5상대(五對)가 있고, ㉯ 법상(法相)의 말에 있음[有]과 없음[無], 범인(凡)과 성인(聖)의 각 상대를 비롯하여 12상대(十二對)가 있으며, ㉰ 자성이 작용을 일으킴에 장(長)·단(短), 번뇌(煩惱)와 보리[菩提], 상(常)·무상(無常) 등의 19상대(十九 相對)를 합하여 모두 36상대(三十六 相對)입니다.
② 대법 법문:육조 혜능 대사의 이 대법(상대 모순)에 관한 설법 중에 “누가 법을 물으면 짝을 지어 대답하여 언제나 대대(對對)로 말하라는 것입니다.” 있음(有)을 물으면 없음(無)을 들고 없음을 물으면 있음을 들어서 대답하되, 있음은 없음이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이고, 없음은 있음이 있기 때문에 있다는 것입니다. 또 범인(凡)을 물으면 성인(聖)으로 대답하고, 성인을 물으면 범인으로 대답하여 범인이 아닌 것이 성인이고, 성인이 아닌 것이 범인이라고 하며, 어두움(暗)을 물으면 밝음(明)으로 대답하고 밝음을 물으면 어두움으로 대답하되, 밝음이 없어지면 곧 어두움이라고 대답하여 밝음으로써 어두움을 나타내고, 어두움으로써 밝음을 나타내어 “오고 감이 서로 원인이 되게 하여 중도의 진리를 이루게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백법 상, 60쪽·하, 193·194쪽)
*백법:백일법문(百日法門)의 준말, 상(上)은 상권, 하(下)는 하권의 각 약칭임.
(3) 화엄종 법장 스님과 임제종사 임제 스님의 중도정의
화엄종의 현수 법장(賢首法藏) 대사가 화엄종의 개종선언서(開宗宣言書)와 같은 「오교장(五敎章, 華嚴一乘敎義分齊章의 준말)」을 지었는데, 이 오교장에 있는 중도의 정의와 오가칠종(五家七宗)의 선종(禪宗) 종파 중에서도 임제종(臨濟宗)이 으뜸입니다. 이 임제종의 종사(宗師)이신 임제 의현(臨濟義玄) 스님이 지은 임제록(臨濟錄, 臨濟慧照禪師語錄의 준말)에 의하여 중도의 정의를 차례대로 서술하겠습니다.
① 현수의 오교장에 의한 중도의 정의:일체 차별 망견을 버리니[反情에], 중도의 근본 원리인 바른 이치가 스스로 나타나고[理自顯이고], 중도의 근본 원리인 바른 이치를 따르니[據顯理에], 일체 차별 망견이 스스로 없어진다[情自亡이니라].
일체 차별 망견을 버린다 함은 모든 두 편견을 다 버리는 쌍차를 말하며, 정리(正理)가 나타난다 함은 모든 두 편견을 버려서 모든 두 편견이 융합하여 중도원리가 드러난다는 쌍조를 말한 것입니다.
이 말은 쌍차하니 쌍조를 하지 않을 수 없고 쌍조하니 쌍차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묘한 표현입니다. ‘정념을 버린다’함은 ‘차(遮), 즉 막는다, 버린다’는 뜻이며, ‘정리를 따른다’함은 ‘표(表), 즉 드러난다, 융합한다’고 하여 화엄종에서는 ‘차(遮)와 표(表)를 가지고 중도를 많이 표현합니다. ‘차’란 ‘쌍차’를, ‘표’란 ‘쌍조’를 말합니다.
중도원리를 설명하는 용어로 쌍차쌍조 말고도 쌍비쌍역(雙非雙亦)·쌍민쌍존(雙泯雙存)이 있는데, 쌍비나 쌍민은 부정인 쌍차이고 쌍역이나 쌍존은 긍정인 쌍조입니다. 불법의 묘미는 철저히 부정하면 대긍정(大肯定)이 나타납니다. 이들보다 더 쉬운 말로 표현하면 진공묘유(眞空妙有)입니다.
진공은 두 편견을 완전히 버린 쌍차·쌍민·쌍비입니다. 이 진공이란 단순히 유(有)에 상대젹인 공(空)이 아니고, ‘공과 유를 다같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공과 유를 다같이 버린다고 하여 단멸공(斷滅空)이 되면 공에 떨어진 외도(落空外道)가 되며 이것도 편견입니다.
“단멸공이 아닌 진공이 되면 상대적인 공과 유를 떠난 묘유(妙有)가 됩니다.” 묘유란 상대적인 공과 유를 버리고 나니 공이 즉 유이고, 유가 즉 공으로서 공과 유가 서로 통하여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묘유가 성립합니다.’ 이것이 쌍조·쌍역·쌍존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진공이 쌍차이고, 묘유가 쌍조입니다. 진공묘유를 바로 알아야 공과 있음(有)이 서로 융통하여 진공하면 묘유이고 묘유하면 진공으로서 이를 차조동시(遮照同時)라 합니다. 쌍차가 쌍조이고 쌍조가 쌍차이며 쌍차하고 쌍조해서 차조동시가 되는 것이 중도의 근본 공식입니다.
② 임제종사가 설명한 중도의 정의:임제 대사가 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를 설명하기를 “부처란 마음이 청정함이요[佛者, 心淸淨是], 법이란 마음에 광명이 비침이며[法者, 心光明是], 도 즉 승이란 어디에서나 청정과 광명이 걸림이 없음이다[道又僧, 處處無碍淨光是].”
(臨濟錄:백법 상, 81쪽)
‘마음이 청정함’은 일체의 차별 망견을 버리는 것으로 ‘쌍차’요, ‘마음에 광명이 비침은 쌍조이다.’ “청정과 광명이 걸림이 없음은” 청정할 때 광명이 나타나고, 광명이 나타날 때 청정하여 “청정과 광명이 둘이 아님을 말하며, 차조동시입니다.”
*도란 승이니 승(僧)은 화합을 뜻하여, 서로 합심하여 화목하게 잘 지내는 사람이다.
*근본은 청정과 광명이 걸림이 없음을 증득한 사람만이 승의 자격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도를 깨치지 못하면 승이 아니라 한 것은 모든 차별 편견에 집착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선종에 있어서도 표현은 달라도 육조 대사께서 유촉하신 대로 중도에 서 있음이 명백합니다.
③ 원융원만한 가르침[圓敎]과 중도:천태종과 화엄종의 두 교판에서 다 같이 “원융원만한 가르침[圓敎]”의 뜻으로 이 중도를 나타내니 그 중도의 내용은 두 편견을 다 막는 것입니다. 마음이 이미 맑고 깨끗해지면 두 편견을 다 막고 바르게 중도에 들어가면 두 법(세계)을 비추게 됩니다. ‘다 비친다’는 것은 위의 모든 상극적인 것이 ‘서로 통한다’는 것입니다[心旣明淨에 雙遮二邊하고 正入中道에 雙照二諦니라]. 이것을 ‘둘 아닌 법문(不二法門)’이라 합니다. 두 편견을 막고 두 편견이 융합하며 두 편견이 융합하면서 두 편견을 버리는 쌍차쌍조를 내용으로 하는 중도가 천태종이나 화엄종을 포함하는 모든 불교의 최고 진리라는 것입니다.
이 점에 관하여 좀 독특한 천태 지관(天台止觀)에 관하여 설명하겠습니다. 천태종에서는 실천적인 수행도를 지관(止觀)이라 부릅니다. 일반적으로 지(止, amatha)는 산란(散亂)한 생각을 그친다는 뜻이고, 관(觀, vi?asyan?)은 제법의 이치를 관조(觀照)한다는 뜻입니다. 지(止)는 차(遮)이고, 관(觀)은 조(照)이므로 마침내 쌍차쌍조의 중도를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또 지(止)는 ‘본체의 진실함[體眞]’이니 진공(眞空)에 비유하고, 지(止)는 또 ‘인연을 따름(隨緣)’이니 묘유(妙有)에 비유합니다. 지는 진공이면서 수연이므로 지를 전환하여 바로 작용하면 그대로가 수연이요 묘유(妙有)입니다. 이 쌍차쌍조하는 중도가 바로 원돈지관(圓頓止觀)입니다. (지자 대사의 摩訶止觀:백법 상, 55·56·58쪽)
그런데 불교 각 종파 간에 중도를 표현하는 방법에 조금씩 차이가 있으므로 이를 설명하고 쌍차쌍조의 유래에 관하여 논술하겠습니다.
④ 중도의 표현 방법과 쌍차쌍조의 유래
㉮ 천태종의 지자 대사는 쌍차쌍조(雙遮雙照)가 중도의 근본 내용임을 말하고, 누구보다도 능란하게 구사하여 중도를 밝힌 이가 바로 천태 지자 대사입니다. (백법 하, 73쪽)
㉯ 화엄종의 현수 법장(賢首法藏) 대사는 쌍차쌍조를 그대로 쓰자니 지자 대사를 추종하는 것 같아서 쌍차쌍조란 말 대신에 쌍민쌍존(雙泯雙存)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것은 부처님이 「열반경」에서 불성을 말씀하시면서 중도를 많이 말씀하신 가운데 쓰신 쌍비쌍역(雙非雙亦)에서 유래합니다. 그러나 같은 화엄종의 재4조인 청량 징관(淸?澄觀, 738∼839) 스님은 현수 스님과는 달리 쌍차쌍조라고 하였습니다.
㉰ 선문(禪門)에서는 두 편견을 떠나는 것만을 말하고 있으니 쌍차만 말하고 전체를 표현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고 오해할 수도 있으나, “두 변을 막는다[雙遮]”는 두 변을 떠나는 것을 말하고 “두 변을 비춘다[雙照]”는 두 변이 완전히 융합하는 것을 말합니다. “두 변은 모두 편견인데 이 편견을 버리면 중도(中道)입니다.” 따라서 “쌍차가 쌍조이고 쌍조가 쌍치입니다.” 부처님이나 예전 조사님들이 쌍차로만 말하거나 쌍조로만 말할 때가 있었지만 쌍차에는 쌍조의 뜻이 내포되어 있고, 쌍조에는 쌍차의 뜻이 들어 있습니다.
(4) 쌍차쌍조의 유래에서 쌍차쌍조라는 말은 「영락경(瓔珞經)」에서 나온 말인데 부처님께서 상세히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천태종의 지자 지의(智者智?) 스님이 중도를 표현하는 용어로 그대로 인용해 썼으며,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지의 스님은 이 쌍차쌍조를 누구보다도 능란하게 구사하여 중도를 밝혔습니다.
화엄종의 현수 법장 대사가 쌍민쌍존(雙泯雙存)이라 하였습니다. 이 말은 부처님이 「열반경」에서 불성·중도를 말씀하시면서 쌍비쌍역(雙非雙亦)을 거론하신 데서 나온 것입니다. 현수 스님의 제자이신 청량 징관(淸?澄觀) 스님은 스승인 현수 대사가 말씀하신 용례를 의식하지 않고 쌍차쌍조라 하였습니다.
쌍비쌍역(雙非雙亦)은 부처님께서 『열반경』에서 불성(佛性)을 말씀하시면서 중도를 많이 거론하신 가운데 나온 말씀입니다.
불성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佛性非有非無]. 그런데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완전히 떠나면 또한 있는 것이고 또한 없는 것이니[亦有亦無],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융합하게 됩니다[有無合故]. 그러므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서로 통하므로 중도라 하는 것입니다[名爲中道].
비유비무[非有非無]에서 유(有)와 무(無)란 모순 상극하는 편견이 있음과 없음으로서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이 서로 고집해 있으므로 서로 통하지 않습니다. 그 통하지 않고 고집하는 편견의 있음과 없음을 다 버리니 “쌍차가 되어서 비유비무가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쌍차가 되면 있음과 없음이 서로 합하고, 서로 통하는 역유역무의 쌍조가 되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을 쌍비[비유비무]·쌍역[역유역무]이라 합니다.
결론:긍정과 부정·진공묘유(眞空妙有)
쌍비(雙非)는 부정인 쌍차이고, 쌍역(雙亦)은 긍정인 쌍조입니다. 철저히 부정하면 대긍정이 나타납니다. 구름이 걷히면 해가 온 누리에 비추듯이 철저하게 부정해 가면 대긍정이 성립합니다. 그런 관계가 쌍비쌍역으로서 중도원리입니다. 중도원리인 쌍차쌍조는 쌍비쌍역이요 쌍민쌍존으로 쉬운 말로 표현하면 진공묘유입니다. 진공이란 두 편견을 완전히 버린 쌍차, 쌍민, 쌍비입니다. 진공이란 유(有)에 상대적인 공이 아니고, “공과 유를 다 같이 버리는 것입니다.” 공과 유를 다 같이 버린다고 하여 단멸공(斷滅空)에 떨어지면 공에 떨어진 외도가 되고 마니 그것도 편견입니다. 단멸공이 아닌 진공이 되면 상대적인 공과 유를 떠난 묘유(妙有)가 됩니다. 묘유란 상대적인 공과 유를 버리고 나니 공이 즉 유이고 유가 즉 공으로서 공과 유가 서로 통하여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묘유가 성립합니다. 이것이 쌍조, 쌍존, 쌍역입니다.
※ 대부정하여 대긍정이 된다하여 차별적인 긍정으로 알면 안됩니다. 이것은 묘한 있음(妙有)이니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통하고 공과 있음이 서로 통하고 선과 악이 서로 통하며 마구니와 부처가 서로 통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진공이 쌍차이고 묘유가 쌍조입니다. 진공묘유를 바로 알면 공과 있음이 서로 융통(雙融)하여 진공하면 묘유이고 묘유하면 진공이며, 진공 내놓고 따로 묘유 없고 묘유 내놓고 따로 진공이 없으니 이것을 차조동시(遮照同時)라 합니다. 쌍차가 쌍조요, 쌍조가 쌍차이며 쌍차하고 쌍조해서 차조동시가 되는 것이 중도의 근본 공식입니다. (백법 상, 78~8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