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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위.북주.수당의 관료적 문벌사족 연구

서위.북주.수당의 관료적 문벌사족 연구

이계명 (지은이)
  |  
전남대학교출판부
2017-02-27
  |  
3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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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위.북주.수당의 관료적 문벌사족 연구

책 정보

· 제목 : 서위.북주.수당의 관료적 문벌사족 연구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중국사 > 중국중세사(위진남북조~당,송)
· ISBN : 9788968493867
· 쪽수 : 794쪽

책 소개

상촌이계명선생 위진수당사연구논문집 2편. 제1편 서위.북주 관료적 문벌사족의 성립과 발전, 제2편 수.당왕조시대의 관료적 문벌사족연구, 제3편 수당관료제의 성립과 전개, 제4편 원문자료의 해설과 번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목차

第1編 西魏ㆍ北周 官僚的 門閥士族의 成立과 發展
第1章 西魏ㆍ北周의 官僚的 門閥士族硏究 / 16
第2章 北周末 尉遲逈 등의 叛亂 / 171
第2編 隋ㆍ唐王朝時代의 官僚的 門閥士族硏究
第1章 7世紀 前後 南朝系人士의 動向에 關한 一考察 / 196
第2章 隋初의 “四貴” / 218
第3章 隋 尙書省의 職能과 人的構成 / 233
第4章 隋ㆍ唐 交替期의 江南諸集團에 관한 一考察 / 261
第5章 中國 科擧制의 成立 / 281
第6章 唐太宗의 世襲刺史 詔勅에 대하여 / 315
第7章 唐前期 均田制崩壞에 對한 一考察 / 350
第3編 隋唐官僚制의 成立과 展開
第1章 序論 / 370
第2章 山東門閥士族의 地位 / 373
第3章 山東門閥士族에 대한 統制 / 406
第4章 唐 官僚制의 成立과 그 展開 / 525
第5章 結論 / 646
第4編 原文資料의 해설과 번역 / 661
찾아보기 / 760

저자소개

이계명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42년 전남 나주 출생 1960년 광주고등학교 졸업 1964년 전남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수료 1969년 전남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수료(문학석사) 1987년 전북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수료(문학박사) 주요 저서 北朝의 士族-范陽盧氏를 중심으로(1987) 隋唐官僚制의 成立과 展開-山東士族ㆍ官僚를 중심으로(1995) 中國政治思想史綱要(2001) 資治通鑑史論探訪(2009) 中國史學史要綱(2014) 魏晉北朝의 門閥士族硏究(2016) 주요 논문 中國科擧制의 成立(1998) 魏徵의 歷史認識 - 『隋書』 史論을 중심으로(2001) 등 3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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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머리말
현재 中國 魏晉隋唐史硏究는 韓ㆍ中ㆍ日 3國이 거의 같은 수준이라고 생각된다. 中國의 대표적인 연구자 陳寅恪선생은 이전에 작성한 논문을 규모나 내용면에서 보강ㆍ확대하거나 再構成하여 『隋唐制度淵源略稿』, 『唐代政治史述論稿』 등을 발표하여 동 時代史의 연구에 金字塔을 세웠다는 칭송을 받았고, 현대 그의 후학들이 수용 발전시키고 있다. 日本 京都大學校의 貴族制論者의 대표 谷川道雄교수는 陳선생과 같은 방법으로 연구를 진척하여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루었고, 中國에서 그 성과와 방법을 수입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그 대표적인 事例로 최근 100여 년간에 염원해 왔던 中國通史, 곧 總主編 白壽彛의 『中國通史』, 張岱年의 『中國全史』가 그것이다. 또한 魏晉隋唐唐시대만하여도 唐長孺 周一良 諸敎授의 수많은 연구 성과가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어 한국ㆍ일본 등의 論著까지 섭렵조차 힘드는 상황이다.
필자는 魏晉隋唐史를 전공하여 1977년 전남대학교 인문대학에 入仕하여 山東郡姓이요, 門風이 優美하였던 范陽盧氏와 關中郡姓으로 군사적인 功績이 탁월하였던 河東薛氏가 門閥士族으로 흠정 받고 漢人 門閥士族(制) 등의 활동상황에 대하여 약 20여 편에 달하는 拙稿를 발표한 바 있다. 2015년 전남대학교 도서출판지원으로 『魏晉北朝의 門閥士族硏究』(常村李啓命先生魏晉隋唐史硏究Ⅰ)를 출판하였다. 이상의 제논문은 균전제를 논제로 설정하고 중국 토지제의 전반ㆍ연원부터 살펴보아야 하는데 방법론을 몰라 당전기 균전제 붕과에 관한 고증적 방법으로 탐방하였으니 한국의 시대적인 한계 등으로 진척시키지 못하였다. 문벌사족에 관한 고증적 연구를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宮騎市定씨가 말한 육조연구 방법론을 이해하지 못한 채, 서위ㆍ북주의 관료적 문절사족에 관한 기가관을 가지고 宇文泰집단에 대하여 고증적으로 연구해보니 향병=부병제를 통하여 기가관을 살펴보니, 필자의 연구방법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박한제교수님이 쓰신 우문태의 虜姓再行ㆍ賜姓에 대한 논문이 필요하여 전화연락을 하였더니 논문 외에 『대당제국과 그유산』을 보내주시고 起家官만은 이번에 꼭 밝혀보라는 따뜻한 충고를 하여 고마웠다. 그러나 박교수님의 애정어린 충고에 따라 모든 논문을 재정비할 수 없어 고증적인 방법을 통한 姓氏學硏究集을 이제 재정비하기에는 힘ㆍ시간이 더 이상 없는 필자는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저간에 전북대학교 송준호지도교수님께서 고증적방법으로 한국 사족연구를 하셨던 연구방법으로 대다수 논문을 써서 범양노씨 등의 문벌사족의 논문집과 고증적 연구방법으로 펴낸 졸작 『中國政治思想史綱要』ㆍ『中國史學史學史要綱』ㆍ司馬光의 『資治通鑑史論探訪』은 필자의 성과라고 내놓아볼만 하다고 보고, 본 논문집을 내놓았었다. 이번에 저간에 고증적 방법으로 작성한 제논문을 약간씩 제정비하였다. 특히 제1편 1장 西魏ㆍ北周의 官僚的 門閥(문벌)士族(사족)硏究는 고증적인 방법으로 『주서』를 분석하여 舊稿 서위ㆍ북주시대에 관한 2편의 논문을 起家官ㆍ襲爵ㆍ功績 등을 정리하여 대폭 보완하였다. 결국 위진수당시대의 연구를 동시대의 성씨 명족ㆍ문벌사족(=귀족)을 통하여 연구한 것이다, 이점에 유념하시어 惠覽을 기대한다.
이제 北朝後期 西魏ㆍ北周의 官僚的 門閥士族(制)은 北魏ㆍ北齊의 그것과 性格과 實態면 등에서 隋ㆍ唐時代 官僚的 門閥士族과 아주 가까운 功績主義的 文武兩兼의 官僚的 門閥士族으로 이해하고 있다. 까닭에 박한제교수님의 『大唐帝國과 그 文化遺産』-胡漢統合과 多民族國家의 형성-(碩學人文講座57/세창출판사 2015년 5월)을 바라보면서 책이름을 『西魏ㆍ北周ㆍ隋唐의 官僚的 門閥士族硏究』(常村李啓命先生 魏晉隋唐史硏究論文集Ⅱ)을 출판한 것이다.
필자가 새롭게 재구성할 『西魏ㆍ北周ㆍ隋唐의 官僚的 門閥士族硏究』(常村李啓命先生 魏晉隋唐史硏究論文集Ⅱ)』의 序說은 『隋唐官僚制의 成立과 展開』에서 詳說하였고 이번에 상당이 보완하였기 때문에 재론하지 않았다. 그 간략한 내용과 목차는 다음과 같다.
第1編 西魏ㆍ北周 官僚的 門閥士族의 成立과 發展
第1章 西魏ㆍ北周의 官僚的 門閥士族硏究
530년 關西大行臺 元帥 ?朱天光 大都督 賀拔岳이 軍閥 高歡의 使嗾를 받은 侯莫陳悅에게 피살되자, 그를 따르던 趙貴 등 50명의 諸將이 夏州刺史 宇文泰를 盟主로 삼아 平?同盟을 결성하였다. 이들 諸將들은 기본적으로 자신들의 州郡縣이나 大小 鄕里社會의 豪傑로 豪俠을 통하여 義勇을 결집하였다. 宇文泰는 高歡을 따르던 侯莫陳悅ㆍ曹泥를 토평하고 534년 고환과 알륵 끝에 入關한 孝武帝의 영접하여 西魏政權을 열어 나라의 正統性과 正當性을 확보하였다. 군벌 고환은 부득이 孝靜帝를 옹립하고 ?에 천도하여 柱國大將軍 大丞相 勃海王으로 晉陽에 覇府를 열고, 아들 高澄과 親信을 ?京에 보내 정치를 操縱하는 入朝輔政體制를 확립하고 對西魏戰을 전개하였다.
이때에 西魏는 領土와 人口上에서 東魏에 열세이었고 文化的으로도 南朝 梁王朝 武帝에 뒤져 있었다. 이에 大丞相 太祖 宇文泰는 蘇綽ㆍ盧辯 등의 關中本位政策, 곧 周禮主義에 입각한 西周 六官制의 採用, 虜姓賜與와 再行 그리고 이른바 隋唐世界帝國의 府兵制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北周 武帝는 宇文護의 專政을 停止하고 北齊를 평정하여 華北을 통일하였다. 隋文帝는 7세기 초에 南朝까지 평정하여 중국을 統一하였고 唐帝國이 再統一한 것이다. 저간에 통치계층을 앞서 말한 陳寅恪선생은 ‘關?集團’, 谷川道雄氏는 文武兩兼의 ‘新貴族’이라 하여 정리하였다. 필자는 이들에 대하여 西魏ㆍ北周의 훈귀집단과 관료사족으로 정리하였으나, 不實하여 이번 기회에 대폭 보완하였다. 그리하여 西魏에서 활약한 文武兩兼의 관료적 문벌사족이 서위의 형성과 발전에서 어떠한 활동을 하고 어떠한 공로를 세웠는가 하는 등의 측면을 考究하여 西魏의 통치집단, 이른바 “關?有武力ㆍ才智者”, 곧 關中ㆍ?西지역의 武力과 才智를 가진 諸將을 비롯한 관료적 문벌사족의 功績과 性格에 관한 역사적 지위에 관하여 재구성ㆍ정리하였다. 아울러 557년 北周의 成立事情, 北周 官僚的 門閥士族와 정치발전에서 등장하여 蜀ㆍ江陵을 평정하는 등에 활동한 인물들의 功績과 그들의 性格 특히 山東과 關?의 郡姓 출신의 활동과 공적을 재구성ㆍ정리하여 북주시대의 官僚的 門閥士族(制)의 실태와 성격을 살펴보았다.
第2章 北周末 尉遲逈 등의 叛亂
580년에 大丞相에 진출한 楊堅에 대하여 等夷關係에 있던 尉遲逈 王謙 司馬消難의 반란경위와 성격 그리고 周隋革命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이로써 西魏ㆍ北周 官僚的 門閥士族의 실태와 성격을 재구성ㆍ정리한 것이다.
第2編 隋ㆍ唐王朝時代의 官僚的 門閥士族硏究
第1章 7世紀 前後 南朝系人士의 動向에 關한 一考察
여기서 말하는 南朝系人士란 주로 西魏 恭帝 원년(554) 江陵平定이래 附庸인 後粱과 平陳前後 入關한 門閥士族의 동향과 활약을 구체적으로 고찰하여 隋王朝의 官僚的 門閥士族에 합류한 사정을 考究함으로써, 그들의 性格을 再構成ㆍ整理한 것이다.
第2章 隋初의 “四貴”와
第3章 隋 尙書省의 職能과 人的構成-隋的 支配集團 把握의 一環으로-라는 논문을 재정비하고 약간을 보강하였다. 즉, 隋王朝初期에 楊惠 虞慶則 蘇威 그리고 高?의 ‘四貴’를 비롯한 이들의 官歷과 官僚的 門閥士族의 志向을 考究하였다. 그리고 隋王朝 關? 官僚的 門閥士族의 文武兩兼的 實務役割에 관점을 두어 關?ㆍ山東의 郡姓을 중심으로 그들의 출신ㆍ역량과 공적을 考究하여 隋王朝의 官僚的 門閥士族의 성격을 파악하려는 방향에서 재구성 정비하였다.
第4章 隋ㆍ唐 交替期의 江南諸集團에 관한 一考察-蕭銑을 중심으로-
隋末ㆍ唐初에 발발ㆍ진행된 農民戰爭중에서 江南의 蕭銑 등 官僚集團과 群盜集團은 山東ㆍ關?의 諸集團과 유사하게 結集하여 隋王朝의 倉粟ㆍ兵器로 隋ㆍ唐王朝와의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렇지만 이들은 강력한 唐軍에게 평정되어 唐王朝의 官僚的 門閥士族이나 백성으로 一元化, 곧 재편성되었다. 貞觀의 治와 盛唐을 연출하는 중요한 정치ㆍ경제적 기반으로 발전하였다. 이에 이를 재구성ㆍ정리한 것이다.
第5章 中國 科擧制의 成立
中國 科擧制는 漢時代 秀才ㆍ明經 등의 分科擧人을 말할 수 있다. 1905년 中國의 現代化시기에 廢止할 때까지의 選擧制를 가르켜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에 필자는 漢代의 鄕擧里選이 曹操의 唯才是擧를 거쳐 이른바 門閥士族制의 제도적인 장치인 九品中正法을 대체하기 위하여 채용된 進士ㆍ明經科로부터 성립되었다고 본다. 이는 隋煬帝 때에 실시한 10科擧人 중에 ‘時務堪應科’가 바로 進士科고 단정하고, 武則天시대에 완성 실행되었다고 정리하였다. 이는 실제로 강대한 皇帝權을 관철하는 제도적 장치이었다. 그리하여 황제가 門閥士族이나 官僚를 통하여 파악하고 나아가 官僚制로 발전한 것이다. 이에 隋唐시대 政界에 진출한 官僚的 門閥士族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에 근거를 제공하는 제도로 발전하였다. 이 제도를 통하여 수당시대에 등장한 官僚的 門閥士族의 實態와 性格을 규명하는 데에 중요한 척도로 이해하고 이를 재구성ㆍ정리한 것이다.
第6章 唐太宗의 世襲刺史 詔勅에 대하여
唐太宗이 唐王朝의 長治久安의 하나의 방편으로 旣存 諸王의 封建이외에 당왕조 건설에 막대한 공로를 세운 功臣들의 역량을 子孫에게 세습시켜 당왕조의 무궁한 발전의 방향을 획책한 것이다. 그러나 그 정책은 時宜에 어긋나고 子孫들의 犯法을 우려하는 공신들의 반대에 부딪쳐 정지시켰다. 따라서 唐王朝의 官僚的 門閥士族의 성격을 명확하게 들어낸 사정으로 이해한다. 이에 이를 당왕조의 관료적 문벌사족이라고 評判할 수 있는 중요 요인으로 삼을 수 있다. 이에 이 논문을 다소 보완하여 재정리하였다.
第7章 唐前期 均田制崩壞에 對한 一考察
均田制는 北魏이래 律令秩序를 관철하는 중요한 제도였다. 그렇지만 根本的으로 狹鄕과 寬鄕이 존재하였고 給田의 有無에 따라 本籍地 移住의 통제되었으며, 방대한 官人營業田 賜田 公解田 職分田 및 食實封制의 실시 등으로 均田農民은 부득이나마 逃亡하여 節度使의 募兵에 참여하거나 客戶로 寄住戶ㆍ寄莊戶로 轉化되어 율령질서의 파탄을 가져와 地主佃戶制라는 사회경제적인 封建化에 밀려 中國封建社會의 후기 혹은 이와 엇물러 唐末五代를 걸쳐 宋代이래의 官僚制에로의 발전을 촉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이를 본 논문집에 제구성한 것이다.
第3編 隋唐官僚制의 成立과 展開-山東의 門閥士族ㆍ官僚를 중심으로-
이 論文 『隋唐 官僚的 門閥士族(制)의 成立과 展開-山東 門閥士族과 官僚를 중심으로-』은 著者의 博士學位論文 『魏晉北朝의 門閥士族-范陽盧氏를 중심으로』의 속편으로 규모가 커서 책으로 硏鑽하였다. 이제 본 논문집 앞 1ㆍ2편의 諸論文의 기초 위에 재구성하였다.
北魏 孝文帝의 漢化政策 특히 姓族詳定을 통하여 胡漢 兩民族의 상층부가 官製的으로 官品에 의하여 체계화하여 胡漢融合에 크게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호한 양민족 상층부만의 漢化와 그들의 封建化 그리고 好奢는 胡漢 차하계층(豪族ㆍ豪右 등)은 選擧에서 不利하였다. 또한 遷洛이후 胡漢 양민족의 차하계층은 시대의 변화를 열망하였다. 그러나 과거 영광스럽던 六鎭의 병사는 물론, 武力과 才智가 있는 자는 洛陽遷都이후 仕宦上의 출구가 막혀 出口가 막힌이외에, 內地의 犯罪者가 鎭民에 충당되었을 뿐만 아니라 鎭將의 탄압수탈 또한 지나쳤다.
까닭에 州郡縣이나 鄕黨에서 豪傑이 豪俠으로 義勇을 결집하여 반란을 평정하고 세력을 확대하는 정치군사구룹이 발생하였다. ?朱榮 高歡 宇文泰가 그 代表格이었다. ?朱榮은 많은 공적으로 정권을 건설하였지만, 스스로 봉건화하고 정권을 세웠지만, 산동 문벌사족 등이 주도하던 체제를 河陰役으로 否定하여 自滅하였고 그 집단에서 성장한 高歡은 高乾ㆍ封隆之ㆍ李元忠 등 漢人 門閥士族과 信都에서 同盟하고 자신이 옹립한 孝武帝와 알륵하여 東魏와 그 연장선상의 北齊가 등장하였다.
이리하여 이 책은 다음 5단계에 걸쳐 隋唐의 官僚士族(制)나 官僚制의 成立과 展開를 설정하여 고찰하려는 것이다. 다만 필자의 박사학위논문이 산동 문벌사족 범양노씨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연장상에서 西魏ㆍ北周 그리고 隋唐時代의 山東 郡姓에 관련된 것이어서 기존의 연구성과를 다소 보완하고 재구성하여 정리하였다. 다만 사실상 士族에 관한 연구는 吳郡四姓ㆍ賜姓ㆍ關中郡姓 그리고 代北虜姓 및 庶民地主層까지 고찰하는 작업이 필요하고 본 논문집Ⅰ의 하동설씨에 대하여 논설을 등재하여 그들의 후예로 이름높은 薛道衡 薛收 薛元超 薛稷 薛仁貴 薛訥 그리고 薛嵩 등에 대하여 정리할 필요가 있지만 필자에게는 더 이상의 시간ㆍ힘이 없어 후학들의 연구에 기대할 뿐이다.
제1단계로 關西大行臺 大都督 賀拔岳이 高歡의 使嗾를 받은 侯莫陳悅에게 피해를 입자, 趙貴 寇洛 赫連達 등의 翊戴, 곧 추대를 받아 平?同盟을 결성하고 후막진열과 曹泥 등을 평정하였다. 곧이어 고환과 알륵 끝에 入關한 孝武帝와 擧義 入關한 山東 門閥士族 출신을 맞이하여 西魏政權을 건설하였다, 大丞相 宇文泰는 蘇綽 盧辯 등이 창출한 이른바 六官制 府兵制 虜姓再行ㆍ賜與 그리고 六條詔書 및 中興永式 등에 입각하여 諸將과 더불어 鄕兵, 곧 府兵制를 점차 보완하여 對東魏戰에서 연전 연승(潼關 沙苑 小關 玉壁 河橋 玉壁大戰에서 대승하고 邙山戰은 약간 불리)를 획득하였다. 또한 漢中 蜀 江陵을 평정하였다. 이러한 諸戰鬪에 참여한 諸將이 關?豪右와 산동 문벌사족으로 入關한 세력과 그 이외에 梁에서 入關한 인물들이었다. 이들과 그들의 자제들이 宇文周政權을 창출하여 周禮主義的이었다. 무제 때의 정치군사력을 보완하여 北齊를 평정하여 화북을 통일하였다. 이러한 북주의 화북통일은 중요한 역사적 계기로 필자는 이들 통치계층을 官僚的 門閥士族으로 정리하여 舊稿를 대폭 보완하였다. 이들은 隋唐시대의 중심적인 통치계층을 陳寅恪씨가 關?집단이라고 말한 이래 아직도 유행하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西魏ㆍ北周의 통치집단이 그 관롱집단의 父祖에 해당되어 상세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보고 추진하였다.
제2단계 北周末 尉遲逈 王謙 司馬消難 등의 反對세력을 평정한 楊堅의 隋朝에서도 關?集團의 지배력이 관철되는 사정 하에서 平齊 후 北周 武帝의 徵召를 받아 入關한 산동 문벌사족들은 형식상으로는 北周의 周禮的 世界, 실질상으로는 北周의 尙武的 世界에서 생활하였다. 이들은 곧 周隋革命의 전환기를 맞아 北魏 末 孝武帝를 따라 入關한 산동 문벌사족과 함께 隋朝의 창건에 막대한 역량을 발휘하여 재상 등 고관에 이르렀다. 高?, 李德林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다른 한편으로 隋朝의 통일정책 예컨대 중앙과 지방행정조직의 개편, 輸籍法 등을 입안하는 과정이나 易太子 事件을 통해서 거세되었던 것처럼 억압받고 채용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隋朝下에서 山東 門閥貴族들의 동향 및 억압되었던 사정을 살펴보고자 第3章은 山東 門閥貴族에 대한 통제로 설정하고, 제1절은 隋王朝時期를 설정하여 다루어 보려는 것이다.
제3단계 隋末ㆍ唐初의 반란이 反?役鬪爭의 성격을 갖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다만 煬帝의 關?出身 인물의 배척과 關?地域을 홀시한 태도도 적지 않게 작용하여 關中에 거점을 설정한 李唐에 유리하였고, 李唐의 본신과 그를 둘러싼 세력은 隋朝와 같은 關?集團이었으며, 그 지배력이 관철되었다. 그렇지만 唐 初期에는 왕조의 창출, 東都平定 등의 재통일, 玄武門事件 등에서 산동의 인물들도 막대한 공로를 세워 그들을 배척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통일왕조로써의 唐왕조는 관료적 문벌사족들로 하여금 왕조의 官品, 禮敎에 맞는 혼인을 이행하게 함으로써 정치ㆍ사회의 질서를 회복하려 하였다. 이런 때 山東門閥士族들은 어떤 동향을 보였는가를 이해하기 위하여 第 3章 2절은 唐 初期를 설정하여 다루어 볼 것이다.
제4단계 長孫無忌를 중심으로 하는 關?集團의 지배는 高宗의 武皇后 冊立을 통하여 와해되고, 정권을 창출하려는 야심만만한 武皇后는 科擧制를 정비ㆍ확대하였다. 北齊의 멸망 이후 山東地域은 낙후되고 山東門閥士族 또한 北朝後期이래 隋朝 및 唐 初期에 여러 가지의 억압과 통제를 받았던 사정에서 武皇后의 정권창출과 같은 기도는 經史 및 문학적 역량이 풍부한 그들에게 있어서 정계에 진출하고 현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어 과거제 등을 통하여 중앙정계에 적극적으로 진출하였다. 이리하여 산동인물들은 門閥士族이라기 보다 官僚로서 關中ㆍ江南에서 진출한 庶民地主層에서 부상한 인물 등과 더불어 관료로 편성되어 드디어 唐朝 官僚制가 성립되었다. 또한 高宗 顯慶年間(656-660)에 官修된 『姓氏錄』과 禁婚令은 관료제 형성의 주요한 작용을 하였다. 이 시기에 山東 門閥士族들이 어떤 동향을 전개하였는지 살펴보고자 第4章 1절은 武后期 官僚制의 성립에 대하여 정리할 것이다.
제5단계 武則天 때에 성립된 官僚制下에서 玄宗의 開元ㆍ天寶時期 및 唐 後期에 士ㆍ庶鬪爭과 黨爭과 같은 정치집단간의 투쟁이 전개되어 결국 士ㆍ庶合流가 이루어졌다. 이는 官僚制 하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 오랜 동안에 산동관료는 어떤 양태로 생활하고 활동하였는가를 이해하고자 第4章 2節은 唐 中ㆍ晩期 산동관료의 동향을 재구성ㆍ정리할 것이다.
제4편 原文資料의 해설과 번역
필자는 入仕이래 中國古代史 中國史學史를 강의ㆍ연찬해왔다. 上古로부터 唐末까지로 광범위하였다. 欽定 正史와 『資治通鑑』 『全唐文』 등 各國文에 보이는 表奏文 詔書 중에 중요한 자료에 관하여 간단한 해설과 번역문을 동시에 게재하여 학부학생 대학원생 연구자 그리고 일반 독자 여러분에게 제공하고자 삽입하였다. 이는 대학생과 원생들이 저명한 杜維運著 權重達譯 『中國歷史硏究方法論』을 추천한다. 또한 지방도시 光州에서 필자의 才智와 자료가 태부족인 상황에서 연구방법조차 개발 되지 않았던 사정에서 참으로 적잖은 노력으로 미흡하나마 몇 권의 저서를 출판하였던 일을 작은 즐거움으로 여생을 살게 되었다. 아울러 이 일을 추진하는 하는 데에 전남대학교 총장님을 비롯한 당국과 출판부 관계자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이 연찬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최영태교수, 발췌문 번역을 도와준 김봉중교수 중어 중문학과 이등연교수님을 비롯하여 이강래 송한용 이성원 윤선자 강은영 김병인 임종명 최혜영교수님 諸位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사학과 조교 이애슬양, 대학원생 이희성군 주은진양 이선희양 김송이양 박혁민군이 2회씩이나 교정해 주어 참으로 고맙다. 그리고 고생고생한 내 아내의 희생적인 내조, 가족의 협조, 특히 내딸 선희의 용감한 효성에 대하여 깊은 감사와 고마움을 전한다.

2017년 2월
常村 李啓命 엮음


第1編 西魏ㆍ北周 官僚的 門閥士族의 成立과 發展

第1章 西魏ㆍ北周의 官僚的 門閥士族硏究

1. 序言

北魏말에 야기된 六鎭의 反亂에 대한 통설적인 해석은 낙후된 선비귀족의 종족적인 反動으로 별다른 理論이 없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魏晋以來 발달되어온 漢人 門閥士族制에 커다란 타격을 주어 정치사회의 전환기가 되었다. 그것은 孝文帝의 여러 가지 漢化정책, 특히 門閥主義로 말미암아 낙후된 선비인과 漢人 門閥士族 그리고 그 차하계층인 광범한 豪右 豪族층으로 하여금 非門閥的인 세력으로 대두하게 하였다. 이들은 종래에 사회적 지위와 기득권을 향유하던 門閥士族에 대항하여 새로운 諸階層을 결합함으로써, 北朝後期에 諸政權, 東魏-北齊와 西魏-北周정권이 성립하였다고 하였다.
이러한 谷川氏의 논설에 동의한 直江直子는 그 당시 諸階層의 결합원리를 제시하여 곡천씨 논설을 보강하였다. 즉, 直江氏는 북조후기 정권에서 주체적 담당자가 북방민족 출신이라고 보았다. 또한 동씨는 谷川氏가 언급한 北族정권을 지지하는 사회에 눈을 돌려 그들 국가의 성격을 거기에 합류한 漢人이 共同體를 指向하였다는 예상에 共感하였다. 그리하여 북족사회의 기초적인 구조를 규명하기 위하여 북진의 반란이후 북중국의 위정자 Group의 세력결집 기반에 대하여 논술하였다.
同氏의 所論은 북위말 내란을 계기로 등장하고 次期의 정권을 담당한 北鎭출신이 北鎭이라는 鄕里社會에 몸을 둔 豪傑들이 豪俠이라는 資質에 따라 鄕里의 民을 義勇으로 삼아 집단을 결집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서위ㆍ북주정권의 주체적 담당자는 한인 사회에 눈을 돌려 사회를 어떻게 재편성하여 운영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리하여 종래 문벌사족과 그 차하계층에 대하여 대항하기보다는 그들을 어떻게 정권에 합류시켜 연합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동시에 關?지방에서 西魏성립이후에 胡漢 官僚的 門閥士族, 곧 統治集團은 徵兵과 鄕兵을 통하여 對東魏戰을 치열하게 전개하던 상황에서 점차로 형성되고 편성되었다. 이런 사정에서 關?의 胡漢 官僚的 門閥士族은 상호 자긍심을 가지고 통치계층으로써의 역할을 분담하는 가운데에 胡漢融合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西魏ㆍ北周의 官僚的 門閥士族의 動向에 관하여 陳寅恪선생은 ‘關?有武力才智者’로 唐前期의 지배집단인 ‘關?集團’으로 정리하였다. 다만 이들 父祖의 활동 실태에 대해서는 소락되었다. 또한 布目潮風씨도 隋王朝와 隋末ㆍ唐初期 통치계층에 대하여 정리하였지만, 隋王朝 唐前期 통치집단에 대하여 정리하였다. 다만 그들의 父祖에 대해서 성명만을 거론하였을 뿐이다. 아울러 谷川道雄氏는 西魏-北周의 통치집단을 ‘新貴族’이라고 정리하였지만, 그 구체적인 실태를 考究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宮騎市定씨는, “西魏-北周에서 功績을 중시하는 새로운 傾向이 출현하였다. 이러한 신경향이 지속된다면 별도의 貴族制를 고려할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따라서 본고의 목적은 平?同盟으로부터 西魏ㆍ北周의 성립과 발전과정에서 활약한 關?의 胡漢 官僚的 門閥士族과 그 차하계층 출신 인물에 관하여 살펴보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谷川氏가 말하는 ‘新貴族’이나 陳寅恪의 ‘關?集團’이나 布目潮風이 말하는 隋와 唐前期에 걸친 통치집단의 父祖의 이력과 경력을 통하여 同時代의 官僚的 門閥士族의 성격을 살펴보려는 것이다.
이들에 관한 연구는 먼저 『資治通鑑』에서 西魏ㆍ北周의 정치군사적인 발전에 대하여 정리할 것이다. 또한 唐太宗 貞觀 10년에 완성한 總裁官 魏徵 등이 편찬한 隋 北周 北齊 梁 陳왕조에 관한 欽定正史 중에, 令狐德?과 岑文本이 主篇한 『周書』의 ?本紀?와 ?列傳?에 ①本官과 世居地 ②西魏 官僚士族界에 등장한 배경과 자격 등 ③功績 昇進(爵)ㆍ封戶 그리고 起家官과 襲爵사항 ④虜姓의 再行과 賜姓 ⑤北周왕조에서 本人과 諸子의 공적을 추적ㆍ종합할 것이다.
그리하여 西魏ㆍ北周의 官僚士族의 시대적인 위치와 동향 그리고 성격 등에 관하여 정리할 것이다.

2. 宇文泰 西魏政權의 形成ㆍ發展

西魏政權의 건설자 宇文泰는 6세기 초반 520년대 北鎭의 반란시기에 輕財好施하는 賢士大夫로부터 부친 宇文肱과 함께 賀拔度拔 등 胡漢 諸豪傑들이 豪俠이라는 기질을 통하여 州郡縣과 각지의 鄕黨이나 宗黨에서 義勇을 結集하여 정권을 구축ㆍ쟁패전을 전개하던 중에 등장하였다. 北魏말 軍閥 ?朱榮이 朝士대학살로 門閥士族制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여 조급히 정권을 창출할 것을 기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이어 懷朔鎭에서 호걸로서 의용을 결집한 高歡은 ?朱氏정권에서 성장하고 ‘國恥家怨’을 雪辱하려는 山東 문벌사족과의 信都동맹으로 ?朱氏를 타도하여 이른바 高歡정권(東魏)과 北齊정권이 성립ㆍ발달하였다.
처음 宇文泰는 孝明帝 正光말 破六韓拔陵에 호응한 衛瓜孤의 위협을 받아 부친 宇文肱과 함께 鄕里의 義勇을 규합하여 孤를 살해하였다. 무리들이 흩어졌다가 다시 침입해 왔다. 이에 宇文肱은 인근의 賀拔度拔(賀拔勝岳의 부친)과 合謀하여 그들을 격퇴시켰으나, 戰歿하고 말았다. 이때에 宇文泰는 獨孤信ㆍ賀拔勝 등과 함께 武川鎭에서 因家하고 友善하여 西魏의 형성ㆍ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周書』 文帝紀에 의하면, 우문태의 先祖는 炎帝 神農氏로부터 나왔다. 黃帝에게 멸망되고 자손이 朔野에 거주하던 중에, 武略이 雄傑한 葛虎蒐가 鮮卑인들의 추앙을 받아 12部落을 統領하던 大人이었다. 그 후 普回가 수렵하던 중에, 玉璽二紐를 습득하여 보니, 표면에 ‘宇文’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宇는 하늘, 文은 임금이라는 의미가 있어 하늘이 宇文國, 宇文氏를 그들에게 준 것이라고 하여 國名과 姓氏名이 나왔다.
普回의 아들 莫那(獻侯)는 陰山에서 남하하여 遼西에 거주하면서 北魏에 의지하여 獻侯로 北魏에 納后하여 舅生의 나라였다. 이시기에 宇文部가 慕容部, 拓拔部, 段部와 함께 鮮卑四部의 한 部族으로 등장한 것이다. 莫那로부터 9세 厚歸豆에 이르러 慕容滉에게 멸망되었다. 아들 陵이 모용씨를 섬겨 부마도위에 오르고, 軍功으로 玄兎公을 받았다. 그는 북위 도무제가 中山에 진출할 때에, 慕容寶를 따라 방어에 나섰지만 모용보가 실패하였다. 까닭에 500騎로 北魏에 귀부하여 都牧主 安定侯에 올랐다가 天興 초에 豪傑로 代都 武川鎭에 이주하여 因家, 곧 一家를 이룬 것이다. 陵의 아들 系, 손자 韜는 武略이 뛰어났다. 증손자 肱은 氣幹이 있어서 북주 무제 保定 초에 德皇帝를 추증하였다.
太祖 宇文泰는 德皇帝의 少子이었다. 모친 王氏가 그를 5월에 잉태하였다. 꿈에, “몸소 아들을 쌓아 보듬고 하늘로 끝없이 올라갔다가 돌아왔다”고 하니, 덕황제는, “이 아이가 天子에는 이르지 못하겠지만, 그 貴함이 끝없으리라”고 하였다. 모친이 분만하자, 黑氣가 온몸에 퍼져있었다. 장성하여 신장이 8척이나 되고 네모난 넓은 얼굴, 아름다운 머리와 수염이 있었다. 또한 팔다리가 길고 등 뒤에는 黑字가 뚜렷하였으며, 龍盤形狀의 얼굴에서는 紫光을 비추어 사람이 바라만 보아도 敬畏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說話는 우문태의 탄생과 용모의 偉大함을 꾸민 英雄觀點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그가 성장하면서 大度가 있고 家人처럼 生業에 종사하지 않았으며, 재물을 가볍게 여겨 기꺼이 베풀면서 賢士大夫와 交流ㆍ結合하였다.
우문태는 諸兄과 함께 鮮于修禮軍에 의지하였다가 鮮于가 실패하여 葛榮軍에 들어가 그의 將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葛榮이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을 보고 諸兄과 함께 탈출을 획책하던 중에, ?朱榮이 갈영을 생포하여 河北을 안정시키는 일에 성공하였다.
이리하여 우문태는 ?朱榮을 따라 晉陽에 옮겼다. 이주영은 우문태와 그의 諸兄이 武略이 있는 것을 보고 背信을 염려하여 제 3형 洛生을 살해하고 자신까지 살해하고자 하였다. 이에 우문태는 강개하여 스스로 家怨을 申理하고 탄원하였다. 이주영은 감복하여 그를 더욱 恭待하였다.
한편 우문태는 앞서 부친과 合謀하던 賀拔度拔의 아들 允ㆍ勝ㆍ岳 3형제와는 특별한 관련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특히 賀拔岳은 어려서 큰 뜻을 가져 베풀기를 좋아하고 한 때에 太學生이었다. 하발악은 처음 廣陽王 元深의 帳內軍主였다가, 형 하발승과 함께 恒州에 鎭하였다가 함락되었다. 이주영에 의지하여 別將 都督으로 사태수습을 의논하여 중시되었다. 즉, 이주영이 육진의 반란과 정치부정의 책임을 물어 朝士를 大規模로 虐殺하자, 高歡은 이주영에게 즉위를 권고하였다. 그러나 하발악은 고환을 주살하여 천하에 사례해야 하고 孝莊帝를 옹립할 것을 주장하여 많은 臣僚들의 찬성을 얻어 定策의 공로로 前將軍 太中大夫를 제수받고 樊城현남에 올랐다. 그는 이주영의 前軍都督으로 ?口에서 葛榮군을 격파하였고 元顥를 격파하여 武衛將軍 光錄大夫에 진출하였다.
그때에 万俟酋奴가 황제를 일컬어 關中이 動亂에 휩싸였다. 이주영은 賀拔岳을 보내 토벌하고자 하였다. 하발악은 개인적으로 형 賀拔勝에게 万俟酋奴 평정에 관하여 ?朱氏 1人을 元帥로 삼고 자신을 副將으로 삼아줄 것을 요청하도록 부탁하였다. 이주영은 크게 기뻐하여 關西大行臺를 설치하였다.
?朱天光을 使持節都督二雍二岐諸軍事驃騎大將軍 雍州刺史로 삼고 賀拔岳을 持節假衛將軍 左大都督으로, 侯莫陳悅을 右大都督으로 삼아 함께 천광의 副將으로 關?지역을 평정하도록 하였다. 이때에 天光은 그의 무리가 二千에도 미치지 못하여 潼關에 이르러 난색을 표명하였다. 하발악은 天光에게, “공이 오히려 늦게 의심한다면, 만약 大敵을 만나면 어찌 하시렵니까”라 하여 천광의 소극적인 태도를 고무시켰다. 이에 천광은 賀拔岳에게, “금일 사건은 하나같이 위임할 것이니, 마땅히 공은 나를 위하여 처리하여 주시오”라고 위임하였다. 천광은 이주영이 보낸 劉貴에게 杖 일백을 맞고, 賀拔岳과 渭北에 진군하여 말 2천필을 획득함에 따라 세력이 크게 떨쳐 마침내 万俟元珍을 추격하여 격파하고 高平에 진출하여 만사추노의 포로 蕭寶寅을 생포하였으며, 平?에서 하발악 후막진숭은 万俟酋奴를 격파하여 關中을 席捲하고 천하에 大赦하였다. 또한 이주천광은 万俟道洛을 牽屯山에서 격파하였고, ?右에 들어가 略陽賊首 王慶運이 万俟道洛을 수용하여 稱帝하였다가 天光에게 平定되어 坑殺되고 말았다. 이에 3秦ㆍ河ㆍ渭ㆍ瓜ㆍ?ㆍ?州가 모두 항복하여 천광은 略陽에 주둔하여 侍中 儀同三司, 賀拔岳은 涇州자사, 侯莫陳悅은 渭州자사에 올랐다.
이때에 步兵校尉 宇文泰는 賀拔岳을 따라 入關하여 征西將軍ㆍ行原州事에 나아가 恩信으로 위무하여 백성이 즐거이 복종하였다. 그것은 우문태가 낙양에서 長安에 이르러 하발악에게 高歡이 皇位를 아직 찬탈하지 못한 것은 公(賀拔岳)의 兄弟때문이라 하자, 岳은 우문태에게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황제에게 다시 보고하도록 하였다. 황제는 하발악을 都督雍華等 20州 諸軍事 雍州刺史로 삼았다. 岳은 平?에 주둔하여 牧馬을 명분으로 내세워 斛拔彌俄突 紇豆陵伊利 費也頭 万俟受洛干 鐵勒斛律沙門 등을 회유함에, 모두 岳에게 의부하였다. 오직 靈州자사 曹泥만이 高歡에 의부하였다. 이리하여 秦ㆍ南秦ㆍ河ㆍ渭 4州刺史가 平?에서 會同하여 賀拔岳의 節度를 받았다. 또한 하발악은 夏州를 중시하여 어진 刺史로 鎭치도록 하려고 인물을 물색하였다. 이때에 宇文泰를 추천받고 자신의 오른팔이라고 하면서도 苦心 끝에 결국 우문태를 表用하였다.
한편 승상 高歡은 은근히 賀拔岳 侯莫陳悅의 강대함을 염려하여 右丞 翟嵩에게 어려움을 말하였다. 翟嵩은 자신이 양인의 중간에 끼어 상호 도모하도록 역할할 것을 자청하여 파란이 예상되었다. 이때에 賀拔岳은 장차 曹泥를 평정하고자 武川에 因家한 趙貴를 夏州의 宇文泰에게 보내 의논하도록 하였다. 우문태는 조니는 멀고 먼 孤城에 있어 당장 걱정할 것 없고, 信義없는 侯莫陳悅을 서둘러 도모할 것을 요청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하발악은 長史 雷紹가 신중하게 처리할 것을 당부한 충고를 멀리하고, 侯莫陳悅을 가볍게 보아 많은 의견을 나누었다. 이에 선봉이 된 侯莫陳悅이 河曲의 軍營에서 군사작전을 의논하자는 구실로 초청하였다. 하발악이 하곡에 이르렀다. 黃河의 河曲은 1千里마다 1曲이 있고 靈州의 서쪽 漢詢卷에서 일단 北流한다. 후막진열은 계속 유인하여 入營한 하발악을 사위 元洪景에게 지시ㆍ살해하고 말았다.
이때에 하발악의 좌우는 모두 散走하였다. 悅은, “내 별도로 密旨를 받은 바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여 움직이지 못하였다. 悅은 마음을 猶豫하고자 諸將을 懋納하지 않고 ?右 水洛城으로 들어갔다. 岳의 諸將은 平?으로 흩어져 돌아왔다. 이때에 趙貴는 悅에게 하발악의 시신을 葬事해 줄 것을 요청하자, ‘壯하다’면서 허락하였다. 悅의 軍中에서는 서로 祝賀하였지만, 行臺郞中 薛澄은 친지에게 개인적으로, “悅의 才略은 본디 작고 순식간에 良將을 해쳤으니, 나는 지금 타인의 포로가 되어버려 무엇을 축하한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하였다.
실제로 534년 2월 賀拔岳을 따라 河曲에 갔던 大都督 趙貴는 部曲을 동원하여 하발악의 시신을 수습하여 平?軍營에 돌아왔다. 諸將들은 소속을 잃고 사태를 처리하지 못하고 당황하고 있었다. 이때에 諸將들은 洛陽의 황제에게 보고하자거나, 荊州의 賀拔勝을 받들어 추대하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시간과 거리관계로 곤란하였다. 이에 趙貴는 諸將들 중에 최연장 寇洛을 總師로 추대하여 사태를 해결하려 하였다. 그러나 구락은 간절하게 사양하고 雄略이 없어 威令이 실행될 수 없었다. 이에 趙貴는, “元帥는 不義로 사망하였으니, 반드시 賢者를 선택하여 諸將을 總統하여 처리해야 한다. 내 가만히 大行臺左丞 宇文夏州를 보니, 영특한 자태와 웅대한 모략이 뛰어났다. 지금 장례를 통보하면 반드시 달려 올 것이다. 그때에 奉戴하면 대사는 모아질 것이다”고 제안하였다. 이에 제장들이 합의하지 못하자, 杜朔周(=赫連達)는 제장들에게, “멀리 있는 물로 가까운 곳의 불을 끌 수 없는 일입니다. 오늘의 일은 宇文夏州가 아니면 능히 구제할 자 없으니, 趙將軍의 의논이 옳다. 나 朔周는 가볍게 달려가 哀事를 알리고 맞아드리겠다”고 제안하여 제장이 적극 합의하여 平?同盟을 결성한 것이다. 이에 赫連達이 자청하여 영접하고자 夏州에 간 것이다.
그때에 夏州자사 우문태는 빈객 韓褒에게 의견을 묻자, 去留之計를 내놓았다. 潁川潁陽人 韓褒의 조부는 平?군수, 부친 演은 恒州자사를 각각 지냈다. 그는 好學하여 經史의 大略만을 섭렵하여 遠大한 方略을 가졌다. 그는 北魏 末 정계에 진출하였지만, 천하가 喪亂으로 夏州에 피난하였다. 이때에 태조 宇文泰가 夏州자사로 부임하여 그를 벽소하여 客禮로 대우하였다. 韓褒는 우문태와 혁련달의 일행에게, “使君은 타고난 姿態가 영걸스런 호반이니, 군사들의 마음을 은혜로 결합하십시오. 寇洛은 스스로 평범하고 나약한 것을 알고 使君에게 의탁한 것입니다. 兵權을 장악하여 關中을 점거할 수 있는 기회를 하늘이 주신 것입니다. 무엇을 의심하십니까? 侯莫陳悅은 平?에서 水洛에 屯營할 것이니, 이것이 우물 안 개구리입니다. 사군께서 가서 반드시 悅을 잡아 탁월한 勳功을 세울 기회는 이번 一擧에 달려 있습니다. 때는 얻기 어렵지만 쉽게 잃는 것이니, 진실로 사군이 圖謀할 것을 청원합니다”고 건의하여 우문태가 받아들였다.
바로 그때에 하주의 羌族 首望이자, 都督이었던 彌姐元珍이 悅측에 가담하고자 음모를 꾸몄다. 이 사실을 우문태가 이미 알고 있었는데, 帳內都督 高平人 蔡祐가 보고하고 일당을 채포하여 奸人으로 몰아 제거하니, 諸將이 同盟하고 侯莫陳悅을 평정하기로 하였다. 이때 蔡祐는 우문태의 제의로 擬制的인 부자관계에 맺었다.
또한 赫連達(=杜朔柱)이 平?에서 夏州에 갈 때에, 동료 중에 한사람이 牧馬하는 백성을 노략질하고자 하였으나, 도리어 宇文公이 죄 없는 백성을 위무하려고 하는 현 시점에서 사리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설득하여 遠近의 백성들이 기꺼이 복종하였다.
이리하여 우문태와 그 휘하는 輕騎로 平?에 달려가고 별도로 杜朔柱에게 먼저 彈爭峽(原州의 百泉縣)으로 가도록 지시하였다. 宇文泰가 平?에 가서 통곡하니 將士들은 모두 悲喜하였다. 또한 고환은 侯景ㆍ張華原ㆍ王基 등을 보내 富貴로 회유하고 설득하였지만, 우문태는 따르지 않았다.
孝武帝는 賀拔岳이 橫死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武衛장군 元毗를 보내 賀拔岳과 侯莫陳悅의 군대를 낙양으로 귀환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우문태는 寇洛 등 諸將이 하발악軍의 掌握하라는 권고로 부득이 수용하였고, 중간에 高歡이 河東에서 막고 있으며, 侯莫陳悅이 水洛에 있으며, 士卒이 거이 關西人들이라 그들의 愛鄕心을 없애기 쉽지 않다는 등의 이유로 점차로 동쪽으로 나갈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황제는 우문태를 關西大行臺 大都督으로 삼아 하발악의 군대를 總統하도록 하였다. 앞서 賀拔岳은 東雍州자사 李虎를 左廂大都督으로 삼았다. 李虎(唐高祖의 祖父)는 제장과는 별도로 荊州자사 賀拔勝에게 달려가 岳의 무리들을 거두어들이기를 요청하였다. 賀拔勝이 따르지 않았다. 이호는 곧이어 宇文泰가 岳軍을 總統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入洛하여 황제를 알현하러 가던 도중에 ?鄕에서 고환의 別將에게 붙잡혀 洛陽에서 황제를 알현하였다. 효무제는 때마침 關中을 취하려고 하여 기꺼이 李虎를 만나 衛將軍을 삼고 우문태에 나아가게 하였다.
이리하여 우문태는 悅에게 서신으로, “賀拔公은 朝廷에 大功을 세웠다. 그대는 명성이 미미하고 행동은 야박하다. 하발공은 그대를 추천하여 ?右行臺를 삼았다. 또한 高氏가 擅權하고 있는데, 그대는 하발공과 함께 密旨를 받고도 누차 맹약을 맺었다. 아울러 國賊에 의부하여 함께 宗廟를 위태롭게 하여 口血이 아직 마르지도 않았는데, 匕首를 이미 빼들었다. 지금 나는 그대와 함께 조칙을 받고자 還闕할 것이니, 금일의 진퇴는 오직 그대의 언행에 달려있다. 그대가 만약 ?東으로 나온다면 나 또한 北道로부터 入洛할 것이다. 만약 首鼠 兩端이면 나는 곧 날짜를 정하여 서로 볼 것이다”고 힐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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