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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68970320
· 쪽수 : 304쪽
· 출판일 : 2017-01-04
책 소개
목차
1. 무관심
2. 우연적 필연
3. 살리에리
4. 흔한 착각
5. 가벼움의 드라마
6. 이카로스
7. 불쌍한 바보
8. 사랑에 눈먼 바보
9. 위험한 재회
10. 죄와 벌
11. 희비극적 불일치
12. 알브레히트
13. 뜨거운 불꽃
14. 욕망의 카멜레온
15. 날개 속에 숨은 칼
16. 데이지
17. 하찮은 벌레
18. 치명적 오류
19. 모두 태양 탓이다
책속에서
오늘도 엉망이군.
효주는 집에서 싸온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며 멍한 시선으로 창밖을 내다본다. 미세먼지에 갇힌 잿빛 하늘이 벌써 한 달째다.
봄날은 그렇게 가는구나. 젠장. 오사카 벚꽃은커녕 서울대공원도 못 갔는데……. 7년 전 상우와 함께 떠난 하동 십리벚꽃길이 마지막이었다니……. 이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온 걸까. 휴우. 작은 꽃망울 한 번 터트려보지 못한 잡초처럼, 그저 질기고 억세게 버텨온 시간들……. 그게 내 인생의 봄날이었다고?
휴우. 그만하자. 아침부터.
교문을 들어선 아이들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뛰는 아이들이 보인다.
이제 곧 수업이 시작되겠군.
반쯤 남은 샌드위치를 서둘러 먹는다. 꿀꺽. 마지막 침이 넘어가는 순간 수업 종이 울린다.
아주 정확하군. 이젠 시계가 없어도 되겠어.
낡은 손목시계 줄을 풀어 던지듯 서랍 속에 넣는다.
매일매일 쳇바퀴 도는 다람쥐는 몸에 밴 감각만 믿으면 되는 거야. 사치스럽게 시계는…….
효주는 휴지로 대충 입을 닦고 천천히 시간표를 확인한다. 거울을 한번 볼까 하다 그것마저 귀찮다.
멍하니 앞을 응시하며 천천히 복도를 걸어가는 효주. 5년 동안 걸어왔던 길인데, 이만 하면 좀 정겹고 편안해도 될 터인데, 늘 고단하고 낯설다. 때론 벼린 칼날 끝에 선 것처럼 섬뜩해지곤 한다.
휴우. 그만하자. 올해만 버티면 될 거야.
효주는 2학년 7반 교실 문 앞에서 깊은 한숨을 내쉰다. 늘 그렇듯 아이들은 선생의 등장에 무심하다. 엎드려 자는 아이, 다른 과목 문제집을 푸는 아이……. 큰 소리라도 한번 질러볼까 하다가 관둔다.
그런다고 뭐가 바뀌겠니.
효주는 칠판 한가득 원소 주기율표를 그려 넣는다.
- 노트에 받아 적어.
칠판에 필기를 다한 효주는 아이들에게 별 관심 없는 듯 교탁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교과서와 함께 들고 온 소설을 꺼낸다. 까뮈의 <이방인>.
오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이방인>의 첫 대사는 아직도 효주의 뇌리에 깊게 새겨 있다.
갑자기 교실 문이 열리면서 후배교사 윤미가 얼굴을 내민다.
- 효주 샘, 지금 교무실!
다급한 목소리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효주는 윤미를 따라 서둘러 교무실에 들어선다. 동료교사 나연이 양수를 흘리며 누워 있다. 양수가 먼저 터지면 뱃속 아기가 위험하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아 효주는 마음이 급하다.
- 효주 샘, 나 좀 도와 줘. 애보다 내가 먼저 죽겠어.
나연은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괴로워하며 효주를 바라본다.
- 얼른 택시 잡아 병원 보내지 뭐하고들 서 있어요?
효주는 구경꾼처럼 모여든 선생들을 나무라듯 말한다.
- 아악…… 효주 샘, 나 죽어…….
효주는 땀을 뻘뻘 흘리며 괴로워하는 나연의 이마를 손수건으로 닦은 후 손을 잡는다.
- 좀만 참아요. 나 따라서 심호흡해. 하나…… 두울…….
나연은 효주를 바라보며 천천히 심호흡을 따라한다.
- 어찌나 효주 샘을 찾아대던지, 나는 애라도 받을 줄 아나 했네.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교감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한다.
- 애는커녕 아직 결혼도 안 한 박 선생이 뭘 알겠어요. 교감 선생님도 참. 그런데 차는 왜 이렇게 안 와?
부장교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119 요원들이 들것을 들고 교무실로 들어온다.
- 잘 될 거야. 힘내고. 수업 끝나면 병원 가볼게요.
효주는 맞잡았던 나연의 손을 내려놓으며 싱긋 웃어 보인다.
나연이 탄 119 구급차가 운동장을 떠난다. 효주는 혼자 남아 떠나는 구급차를 바라본다. 교문을 빠져나가 우회전을 하고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본다.
선배는 왜 굳이 나를 찾았을까. 119 구급차까지 불러놓고. 교감 말처럼 애도 낳아본 적 없는 나를 왜 그리도 간절히 불렀을까. 맞아, 선배는 늘 그랬지.
허망한 눈빛이 스친다. 효주의 가슴 한쪽이 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