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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70637044
· 쪽수 : 372쪽
책 소개
목차
광화문, La Vie En Rose
충무로, The End Of The World
응암 오거리, 벌꿀호프
홍제동, 아침이슬
춘천, 소양강댐
대천, 1박 2일
공주, 훈련소 가는 길
대전, 눈 내리고 또 내리고
도서관, 4층 작은 섬
다시 군대, 밀크초콜릿
이태원, 다른 여자
명동성당,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월미도, 미래도 기약도 없는
안녕, 두 번의 인사
고작 3개월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에필로그
작가의 말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너절한 시절. 세상을 모르는 내게도 90년대는 80년대와 달랐습니다. 무엇을 하건 어정쩡하고 무엇을 꿈꾸건 너절했으니 그게 바로 90년대. 80년대가 격렬했다면 90년대는 야비했습니다. 80년대가 야생마 같았다면 90년대는 그늘에 숨은 고양이 같았습니다. 그건 89학번과 90학번의 차이와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경찰 검문을 피해 달아나던 조선대 이철규와 안기부 여직원 따라 거문도에 내려간 중앙대 이내창의 변사체가 잇따라 발견되고, 물고문 전기 고문 관절 빼기 등 남다른 기술로 옥조근정훈장을 받았던 이근안(지금은 안수받고 목사가 된)의 지명수배 전단이 교내 이곳저곳에 핏자국처럼 나붙고,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임수경이 참가하고, 동의대에서 불이 나 진압경찰 7명이 숨지고, 큰일 난다고 만들지 말라고 난리 치는 속에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설립되고, 사상 최고의 지하철 파업이 2주 동안 벌어지고 농민대회가 열린 여의도광장에는 전국의 농민들 2만 명이 몰려들고. 89학번들이 겪은 1년은 그러했습니다. 고작 한 학번 위의 그네들이 무거운 부채 의식을 15킬로그램 정도 어깨 위에 올려놓은 듯 어른 행세를 하려 드는 이유가 또한 그러했을 겁니다. 이른바 ‘격동의 80년대’가 끝나고, 5공 특위에 불려 나왔다가 어물쩍 퇴장하는 전두환을 향해 민주당 초선위원 노무현이 명패를 집어던지며 시작된 ‘대망의 90년대’. 90학번들이 맞이하는 1990년은 그와 달랐습니다. 앞과 뒤가 다르고 안과 밖이 달랐습니다. 3당이 합당해 민자당을 만들고, 체코슬로바키아와 동독에 이어 소비에트연방 레닌 동상마저도 철거되고,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 설파하던 CF 여왕 최진실이 탄생하고, 16밀리 영화 「파업전야」가 도색잡지 떠돌듯 대학가에 몰래 떠돌고, 분단 45년 만에 처음으로 남북고위급회담이 열리고, 독일에서는 베를린 장벽이 조각나 기념품으로 팔리고, 미군 최강의 B-52 폭격기가 이라크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장면이 CNN 화면으로 생생히 보도되었습니다. 세상은 변했지만 변한 게 없었습니다. 다만 너절하고 너절했습니다. 대학 또한 여전했습니다. 수업보다 많은 게 집회였고 교수들 강의보다 몇 배는 친숙한 게 확성기 구호. 대학은 휴업을 선언하고 총학생회는 휴업 거부 투쟁을 선언하고. 자의 반 타의 반 가투에 참가한 게 대략 여덟 번? 선두에 나선 선배들이 화염병, 보도블록 조각 던지고 철봉 휘두르며 싸울 때, 뒤에서 우왕좌왕 숨이 컥 막히는 지랄탄 가루에 눈물 콧물 쏟아내던 게 전부였지요. 그러다보니 학기말 고사가 코앞.”
- 본문중에서
“실재하는 사랑. 구체적인 사랑. 오고 가는 감정이 분명한 사랑. 반응이 있고 반응할 수 있는 사랑. 주장하고 요구하고 따질 수 있는 사랑. 술 먹고 망가질 수 있는 사랑. 웃고 투정 부리고 화내기도 하는 사랑. 만질 수 있고 뽀뽀할 수도 있는 사랑. 어느 모로 봐도, 미림 선배 때와는 질적으로 같을 수 없는 사랑. 진짜 사랑. 한때는 그것만으로 충분했지요. 한때는.
그러나 현실은 그보다 현실적이더군요. 그보다 구체적이고 그보다 노골적이었지요. 은원과 하고 싶었습니다. 진짜 사랑이니 진짜 하고 싶었습니다. 저만 그런 건 아닙니다. 남자들이 다 그렇지요. 사타구니 거뭇해지는 10대부터 주름진 뺨에 검버섯 피어나는 나이까지 세상 남자들이 단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같이 궁리해 마지않는 게 세 가지 있답니다. 중고등학생 시절, 식탁에 앉아서도, 칫솔 물고 좌변기에 앉아서도, 학교 가는 버스를 타고 꾸벅꾸벅 졸면서도, 교실 창문 밖으로 구름 낀 하늘을 멍히 바라보면서도 한 시간에 한 번씩 1분에 한 번씩 생각하는 게 또한 그 세 가지였지요. 여자 생각. 하는 생각. 여자와 하는 생각. 지금 어디 있을까 장차 내가 사랑할 여자는. 지금 무엇을 할까 훗날 나와 섹스할 여자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여자친구와의 상상 속 섹스는 늘 슬프도록 설렜습니다. 한 시간에 한 번 1분에 한 번, 함께 미친 듯이 섹스하는 그녀는 누구일까. 어느 학교 몇 학년 몇 반일까. 이과일까 문과일까.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녀를 만나 상상 속의 꿈을 현실로 이루게 될까. 은원이 세상 여느 여자와도 다른 존재가 된 이후로, 오래 묵은 의문의 해답을 비로소 찾아낸 기분이었지요. 얘로구나. 내가 사랑할 여자는. 얘였구나. 나와 섹스할 여자는.”
- 본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