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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88972754480
· 쪽수 : 300쪽
책 소개
목차
1부 추억의 경쟁
밥상을 들 때의 마음으로 | 굴렁쇠 | 이사 | 반지의 힘 | 이러다 목련꽃 피면 어쩌지 | 명동성당 | 추억의 경쟁 | 두릅을 따며 어머니 생각 | 봉선화 감성 | 지하촌 | 물고기 | 함석대문이 있는 풍경 | 산소 코뚜레 | 교장선생님, 멀리 날다 | 1997,양화대교 | 오이냉국 | 나는 내 맘만 믿고
2부 전등사에서 길을 생각하다
함씨 | 집에 대한 단상들 | 길거리에서 핀 매화 | 길상이 가라사대 | 막걸리 안주는 인절미가 최고인데 | 열쇠 | 보문사 가는 길 | 허리 |우스갯소리 | 인터넷에도 없는 낙지 잡는 법 | 산초 | 잘 가라, 이 봄 | 군내 버스 | 낙지 잡기 패인 분석 | 맛 | 전등사에서 길을 생각하다
3부 우리 시대의 약도는 무엇일까
불꽃놀이 | 망원경 | 민들레꽃 | 고구마 캐기 체험 나온 아이들을 보며 | 태풍이여 제발 진로를 | 수자기帥字旗를 아시나요? |저수지 가는 길 | 인터넷 시詩 변질 유감 | 백중사리 | 우리 시대의 약도는 무엇일까 | 접목 | 논물 거울 | 돌고래를 찾아서 | 낭만 성형수술 | 촛불 | 총소리 | 바닷물 위에서의 반성 | 가을, 우리는 무엇을 남길까 | 사람 소리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508호실에 또다시 밤이 왔고 나는 혼자 서툰 기도 혹은 혼잣말을 했다.
어머니, 소가 되셨나요. 왜 코뚜레를 하고 계세요?
어머니, 코끼리가 되셨나요. 왜 코에서 나온 호스로 미음을 드시죠?
어머니, 소처럼 벌떡 일어나세요.
어머니, 코끼리처럼 큰 소리로 저를 한번 불러주세요.
그리고요, 이건 정말 궁금한 건데요,
“내가 누구여?”
이렇게 물었을 때 제가 “엄마” 하고 대답한 것은 몇 살 때였나요.
또 장소는 어디였죠?
저는 왠지 향나무가 있던 우물가였거나, 바깥마당에 있던 대추나무 아래였으면 좋겠어요.
제 대답을 듣고 어머니 기분은 어떠셨나요? - '산소 코뚜레' 중에서
언젠가, 어머니 등에 업혀 큰 물가를 지나는데 비가 내렸던 그 물가가 어디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갓난아기였던 네가 그걸 어떻게 기억하냐며, 큰 누이 데리러 제천 의림지를 지나는 거였다고 말해주었죠. 그때 어머니한테 궁금했던 것들을 다 물어볼 걸 그랬어요. 참, 나도. 물어보지 못해 영원히 알 수 없게 된 것들이나 생각하고 참, 한심하지요.
이젠 043으로 시작하는 고향 쪽 전화번호가 찍혀도 크게 놀라지도 않는걸요. 왠지 아세요? 축이 없어진걸요. 운동기구 역기 아시죠. 손잡이 없는 역기를 한번 떠올려보세요. 그리움과 슬픔 두 바퀴가 아직 있기는 한데, 손잡이가 되는 축이 없어진 것 같아요. 허공을 움켜잡고 들었다 놓는 것처럼 허전하기만 해요. 이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없는 두 바퀴만 덩그렇게 남았으니 말이죠. 이제 나는 죄를 짓지도 못하잖아요. 제일 큰 죄 지을 수 있던 대상이 없어졌으니까요. 팽팽하던 낙하산 줄 하나가 팅 끊어진 것도 같고 내 삶을 늘 달아주던 오래된 앉은뱅이저울이 고장 난 것도 같아요. - '나는 내 맘만 믿고' 중에서
아카시나무 가로수가 시작된 지점에서 길의 우측인 산 쪽은 리기다소나무 숲이 끝나고 쇠사슬나무와 갈참나무 숲이 이어진다. 이 나무들은 곧고 근육질이어서 마치 암놈이 없을 것 같다. 졸참나무 낙엽이 다급하게 바스락거린다. 바스락 소리가 휘모리장단으로 가파르게 치닫는다. 꿩이 날아오른다. 꿩의 활주로는 꿩을 하나도 돕지 않는다. 꿩에게 제 가속도를 측정해볼 기회를 줄 뿐이다. 꿩은 다리의 길을 접고 날개의 길을 편다. 딱딱하길 바라던 길에서 허탕을 치는 길로 길이 이어진다.
꿩이 내달은 길은 고라니 길이 될 수 있고 고라니 길은 사람 길이 될 수 있다. 사람이 걸어 다니던 길은 큰 차도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지금 막 꿩이 낸 길은 길의 새싹인가. 길들은 진화와 퇴화를 반복하며 서로 만난다. 길끼리 만나지 않는 길은 존재할 수 없다. 길 중에, 섬[島]인 길은 없다. 길들은 다 일가친척이다. - '전등사에서 길을 생각하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