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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외국에세이
· ISBN : 9788972757719
· 쪽수 : 336쪽
책 소개
목차
제1회 소설가는 포용적인 인종인가
제2회 소설가가 된 무렵
제3회 문학상에 대해서
제4회 오리지낼리티에 대해서
제5회 자, 뭘 써야 할까?
제6회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든다―장편소설 쓰기
제7회 한없이 개인적이고 피지컬한 업業
제8회 학교에 대해서
제9회 어떤 인물을 등장시킬까?
제10회 누구를 위해서 쓰는가?
제11회 해외에 나간다. 새로운 프런티어
제12회 이야기가 있는 곳ㆍ가와이 하야오 선생님의 추억
후기
리뷰
책속에서
[…] 아무리 거기에 올바른 슬로건이 있고 아름다운 메시지가 있어도 그 올바름이나 아름다움을 뒷받침해줄 만한 영혼의 힘, 모럴의 힘이 없다면 모든 것은 공허한 말의 나열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그때 몸으로 배운 것은, 그리고 지금도 확신하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말에는 확실한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힘은 올바른 것이 아니어서는 안 됩니다. 적어도 공정한 것이 아니어서는 안 됩니다. 말이 본래의 의미를 잃고 제멋대로 왜곡되어서는 안 됩니다.
_「제2회 소설가가 된 무렵」
야쿠르트 선두 타자는 미국에서 온 데이브 힐턴이라는 호리호리한 무명의 선수였습니다. 그가 타순 1번이었습니다. 4번은 찰리 매뉴얼입니다. 나중에 필리스의 감독으로 유명해졌는데 그 당시 그는 실로 힘세고 무시무시한 인상의 타자여서 일본 야구팬에게는 ‘붉은 도깨비’라는 별명으로 통했습니다.
히로시마의 선발 투수는 분명 다카하시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야쿠르트의 선발은 야스다였습니다. 1회 말, 다카하시가 제1구를 던지자 힐턴은 그것을 좌중간에 깔끔하게 띄워 올려 2루타를 만들었습니다. 방망이가 공에 맞는 상쾌한 소리가 진구 구장에 울려 퍼졌습니다. 띄엄띄엄 박수 소리가 주위에서 일었습니다. 나는 그때 아무런 맥락도 없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문득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 나도 소설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라고.
그때의 감각을 나는 아직도 확실하게 기억합니다. 하늘에서 뭔가가 하늘하늘 천천히 내려왔고 그것을 두 손으로 멋지게 받아낸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어째서 그것이 때마침 내 손안에 떨어졌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때도 몰랐고 지금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유야 어찌 됐건 아무튼 그것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뭐라고 해야 할까, 일종의 계시 같은 것이었습니다. 영어에 epiphany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본어로 번역하면 ‘본질의 돌연한 현현顯現’ ‘직감적인 진실 파악’이라는 어려운 단어입니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어느 날 돌연 뭔가가 눈앞에 쓱 나타나고 그것에 의해 모든 일의 양상이 확 바뀐다’라는 느낌입니다. 바로 그것이 그날 오후에 내 신상에 일어났습니다. 그 일을 경계로 내 인생의 양상이 확 바뀐 것입니다. 데이브 힐턴이 톱타자로 진구 구장에서 아름답고 날카로운 2루타를 날린 그 순간에.
_「제2회 소설가가 된 무렵」
이따금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장은 번역 투’라는 말이 들립니다. 번역 투라는 게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건 어떤 의미에서는 맞는 말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빗나간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첫 한 장 분량을 실제로 일본어로 ‘번역했다’는 단어 그대로의 의미에서는 그 지적도 일리가 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실제적인 프로세스의 문제에 불과합니다. 내가 거기서 지향한 것은 오히려 불필요한 수식을 배제한 ‘뉴트럴한neutral’, 활동성이 뛰어난 문체를 획득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추구한 것은 ‘일본어다움을 희석시킨 일본어’ 문장 쓰기가 아니라 이른바 ‘소설 언어’ ‘순수문학 체제’ 같은 것에서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지점에 있는 일본어를 채용해 나만의 자연스러운 음색으로 소설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을 각오가 필요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때의 나에게는 일본어란 단지 기능적인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는 얘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_ 「제2회 소설가가 된 무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