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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청소년 > 청소년 문학 > 청소년 소설
· ISBN : 9788972971627
· 쪽수 : 276쪽
· 출판일 : 2025-07-04
책 소개
책속에서
리타가 나타났을 때 그건 정말 ‘등장’이라고 할 만했어요. 곱슬거리는 빨간 머리, 커다란 초록색 눈, 찰랑찰랑 소리를 내는 팔찌를 하고선 홀연히 나타났거든요. 리타는 꽉 찬 교실을 눈으로 훑다가 마침 비어 있던 제 옆자리를 발견했죠. 전 속으로 생각했어요. ‘오, 완전 좋은데?’
우리 학교엔 괜찮은 친구들이 정말 많아요. 비고, 티무르, 소프, 레나, 에메마리…. 제 사회생활은 나름 잘 굴러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리타가 나타났을 때, 세상이 파리떼로 가득한 줄도 모르고 살다가 그 한가운데에 나비가 있었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달은 느낌이었어요. 그리고 그 나비는 바로 리타였어요.
그날 저녁 저는 꾀죄죄한 몰골로 티무르네 집에 도착했어요. 가을이 원래 그렇잖아요. 낮이 짧아지고 여름은 싫증 난 연인처럼 우리 곁을 떠나가지요. 사람들은 청바지, 긴팔 셔츠, 자켓을 입기 시작하고요. 사람들이 뚜렷이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저는 일조 시간, 하늘의 높이, 긴 여행을 떠나기 전에 양식을 비축하는 철새들이 우리가 세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해요.
우리 인간들은 새 학기를 준비하고 시간표에 적응하느라 바빠요. 엄격한 일과표가 수면으로 다시 떠오르죠. 태양의 에너지는 오래 꾸물거려요. 우리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겨울을 준비하고 싶은 욕구를 차츰 뼛속 깊이 느껴요. 몸을 웅크리고 포근함, 어쩌면 느림을 누리고 싶은 거죠. 그래요, 저에게 가을은 움츠리기의 계절이에요.
우리는 한참을 어둠 속에서 눈과 귀를 활짝 연 채 서로 몸을 꼭 붙이고 있었어요. 우리는 세상의 중심에 있었고 어떤 동물들이 우리 옆으로 지나갔는지는 알 수 없었어요. 그것들은 사라졌고 또 다른 것들이 접근했다가 더 멀리 가 버렸어요. 우리는 그들을 알아내려 하지 않았어요. 보려고도 하지 않았어요. 그저 우리 둘이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에 감사했어요. 우리는 조심스러운 손님이었고, 이 아름다운 순간의 특권을 아는, 그런 손님이었어요. 어둠 속에서는 가볍게 스치거나 밟히는 나뭇잎이 어쩜 그렇게 큰 소리를 내고 강렬하게 다가오는지 몰라요. 상상력이 들끓고, 진정한 소리가 들려요. 드물고 귀한 현재의 순간이 우리를 빨아들이죠. 달이 자신을 괴롭히던 구름에서 이따금 벗어나면 휘영청 은빛이 우리 망막에 밀려들었어요. 그럴 때면 어떤 궁둥이, 주둥이, 귀, 웅크리고 있는 날렵한 실루엣, 여우의 털을 알아볼 수 있었어요. 그러다가 구름이 다시 달을 삼키면 어둠이 우리도 함께 삼켜 버렸지요. 우리는 하나의 시(詩)를 관통하고 있었어요. 아니, 그 시를 직접 살아냈어요. 그리고 저는 리타와 함께 이 마법 같은 순간을 나눌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어요. 우리가 어떤 비밀스러운 원 안으로 초대받은 것만 같았어요. 거기까지 들어온 인간은 아마 없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