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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74472696
· 쪽수 : 304쪽
· 출판일 : 2022-12-20
책 소개
목차
서언 / 구름 같은 벼슬 따윈 급급할 바 아니라서… 4
만남 9
현금보 20
탄생 30
왕금, 피눈물에 젖다 42
소개장 67
금슬의 노래 105
고려사 134
단금지교 159
보물 사냥 171
역모의 씨앗 185
재회 192
매화 그림의 비밀 212
하늘가 검은 구름은 비를 머금고 219
경오자를 살려라 236
붓놀림은 봉황이 몸을 뒤채는 듯하다 246
검은 학의 춤 273
돌아오지 않는 강 286
금객, 마지막 탄주에 지다 294
저자소개
책속에서
‘공민왕 거문고’를 생각한다. 수덕사에 수장되어 있는 ‘공민왕 거문고’의 주인은 육교(六橋) 이조묵(李祖黙)이었다. 이조묵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조선 최고의 골동서화 수장가로 거문고를 사들였다. 거문고와 악보를 빙허각 이씨와 시동생이며 제자인 풍석 서유구의 감정으로 진품임을 재확인했다. 또한 어느 누구도 왕의 거문고에 손대지 못하던 일을 해냈다. 길일을 잡아 거문고에 새겨진 ‘恭愍王琴’ 금명과 함께 내력을 쓴 찬문이 이조묵의 친필이며 아로새긴 각자도 본인의 솜씨다. 끝내 거문고는 대원군 이하응에게 넘어가 손자 의친왕 이강이 만공스님에게 시주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조묵은 6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한 문헌공 이창수의 장남이었지만 입신출세를 멀리하고 과거에는 응시조차 하지 않았다. 언제나 공민왕 거문고와 함께하였다. 진정한 금객이었다. 그는 외곬으로 시서화와 금석문과 고증학에 심취했다.
필자는 골동서화에 빠져 살았던 금객 이조묵의 예술정신을 기리고자 1,095일간 붓을 놓을 수가 없었다. -- ‘서언’ 중에서
공민왕은 노국공주가 난산으로 숨지자 슬픔에 겨워해 석상자고동으로 거문고를 만들었다. 공민왕은 노국공주의 죽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거문고에 매달려 위안 삼았다. 결국 왕조가 파국으로 치달았다. 고려의 마지막 군주였던 공양왕이 거문고를 끌어안고 혁명군에게 참살당한다.
나라가 바뀌자 피 묻은 거문고와 악보의 주인도 바뀌었다. 거문고는 이방원이 두문불출하던 맏형인 진안대군 이방우에게 보냈다가 퇴짜를 맞았다. 다시 회유책으로 동문수학한 고려인 야은 길재에게 보냈으나 속셈을 알아챈 벗은 선물을 미련 없이 돌려보냈다. 세종이 총애하던 박연에게 국악을 연구하라고 거문고를 주었으나 아들이 ‘단종복위거사’에 가담하자 연좌되어 세조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거문고는 광해군과 인조를 거쳐 김자점에 이르렀다. 김자점은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전리품으로 핏기 가시지 않은 거문고를 하사받은 것이었다.
조선과 중국의 문인들은 온통 동파(東坡) 소식(蘇軾)에 빠져 있었다. 19살의 이조묵은 추사 김정희의 소개장으로 청나라 대학자 담계 옹방강(翁方綱)을 만나기 위해 북경으로 험난한 여행길에 나섰다. 왕의 거문고도 동행했다. 옹방강은 박제가에게 글공부해서 시 ‧서 ‧ 화에 능하고 진적을 찾아내는 손자뻘인 감식안을 단박에 알아보았다. 금석문 따라 고증학으로 명분만 내세우는 허울은 벗고 실사구시 학문을 강론하였다. 옹방강은 이조묵에게 아끼던 ≪천제오운첩≫까지 손수 모사해 주면서 자신과 묵연의 증거로 삼게 하였다. 이조묵은 옹방강과 사제지간이 되고 아들 수곤과는 단금지교를 맺었다. 이로써 조선과 중국의 격의 없이 서로를 아끼고 예우해주는 동등한 학문적 민간외교의 초석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조묵에 있어 시문집과 화첩은 차치하더라도 신라와 백제 나아가 고려의 금석문을 고증한 ≪나려임랑고≫는 다른 문장가와 비교된다. 청평사 중수기비문을 취재하고 ‘붓놀림은 봉황이 몸을 뒤채는 듯하다’고 묘사할 정도였다. 또한 탁본할 때 실전교재인 <탁비비결>은 아무도 계몽한 적이 없었던 가히 독보적이다.
헌종도 소동파의 지독한 마니아였다. 당호도 소동파를 보배로 삼는다는 보소당(寶蘇堂)으로 지었다. 사랑하는 경빈 김씨를 위해 지은 건물의 ‘낙선재’ 편액은 옹방강의 제자 섭지선의 글씨다. 낙선재의 기둥에 주련 글씨는 옹방강의 친필이다. 사제지간은 서체가 빼닮았다. 이조묵의 시서화나 김정희의 추사체도 옹방강의 영향을 크게 받았을 것이다. 조선과 중국을 아우르는 소동파에 빠진 문인들이었다.
훗날 고종은 퇴위 직전에 이조묵이 끔찍이도 멀리하던 벼슬을 내렸다. 비록 그가 세상을 떠난 뒤였지만 통훈대부 장례원 장례를 추증받은 것이다.
<‘구름 같은 벼슬 따윈 급급할 바 아니라서…’ 중에서>
이방우는 도성에 발을 들여놓기 싫다고 하였다. 옛 태봉국의 도읍지였던 철원으로 내려가 명성산(鳴聲山) 자락에 은둔하였다. 명성산은 이름대로 울음산이다. 궁예(弓裔)가 신라의 부흥을 꿈꾸며 세운 태봉국이 10년을 겨우 넘기고 왕건(王建)에게 무너지고 말았다. 궁예가 이곳에 몸을 숨겼다가 피살되었다. 이름 모를 새들이 날아들어 온 산을 가득 메워 슬피 울었다. 그 후로 산 이름이 되었다. 이방우의 심사도 그랬다. 태조가 보낸 밀사도 만나주지 않았다. 어느 날 움막에 초립을 쓴 젊은이가 찾아왔다.
“나으리. 뵙기를 청합니다.”
“누구냐? 썩 물러가지 못할까!”
이방우는 말방울 소리를 들었지만, 방문을 걸어 잠그며 대꾸를 했다.
“나으리께서 탄주를 즐기신다고 거문고를 가져왔습니다.”
“다 소용없다. 도로 가져가게나. 방원이에게 다신 이런 짓 하지 말라고 이르게. 다시 사람을 보내면 활을 쏘아 죽일 거라 전하게.”
“안 됩니다. 좀 전에 말씀 올린 대로 소인은 황천행입니다요. 나으리, 부디 이번만이라도 거두어 주십시오.”
대검은 한 식경이나 땅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이방우는 보다 못해 움막의 뜰로 나왔다.
“이 사람 고집도 주인을 닮았구만. 그리하면 거문고만 두고 다른 물건들은 가져가게.”
“나으리, 소주는 어찌할까요?”
“허허, 이놈이 그래도. 그리 짐이 많으면 놓고 가거라.”
이방우는 그날 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빈속에 마신 순도 좋은 소주가 취기를 올렸다. 호롱불에 심지를 돋우고 거문고를 눕혔다. 한눈에 명기임이 분명했다. 줄을 대략 당겨 매고 맨손으로 유현을 튕겼다. 칼날같이 높은 소리를 냈다.
당, 동, 징
술대를 잡았다. 대현 줄을 당겼다.
덩, 둥, 등
낮지만 굵은 음이 퍼졌다. 약간의 흥이 돌자 여섯 줄을 연타해 보았다.
싸랭, 뜰, 뜰
이방우는 산조보다 정악을 좋아했다. 한동안 거문고 타기에 빠져 세상을 잊을 수가 있었다. 비바람이 심한 날이었다. 도성의 이방원에게 서찰이 한 통 전해졌다.
방원아, 보아라.
각설하고, 아버님께서는 잘 계시느냐? 너는 사방팔방 바쁘단 소리는 간간이 듣고 있다. 네가 그래도 형을 위해 보내준 거문고 덕분에 큰 위안이 되었구나. 한데 얼마 전에 거문고를 뒤집어 보았더니 놀랄 일이 생겼다. 전 주인의 낙관을 보고 말이다. 이재라면 공민왕의 호가 아닌가. 아니라면 아니라고 답해보게. 왕조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 애장품까지 강탈했다는 말인가. 또한 핏자국 같은 것이 오동나무에 배었구나. 아, 통탄할 일이로다. 저승에 가서 우리에게 녹봉을 주던 왕씨들을 어찌 대면할 수가 있을 겐가.
아우야.
사건의 전모를 안 이상 내가 이 거문고를 탄주한다는 자체가 불충이라 생각한다. 하여 이 거문고를 돌려보내니 너무 야박하게 생각 말아라. 나는 고려인으로 이렇게 소주나 마시며 살다가 죽을 터이니 그리 알아라. 그리고 흩어진 식솔들을 모아 고향 땅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어릴 때 우리 여섯 형제는 함흥에서 밥 잘 먹고 천자문도 읽고 산을 타며 전쟁놀이도 하였다. 그때는 너무나 행복하지 않았느냐. 어머님이 그립구나. 날 찾지 말아다오. --고려인 이방우
공민왕의 거문고는 이방원의 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는 이방우의 서찰을 받아 읽고 나자 탄식이 절로 나왔다.
“아아, 큰형님께서는 이리도 아우의 심정을 몰라주십니까.”
이방원은 쏟아지는 눈물을 참지 않았다.
드디어 보위에 오른 왕세자는 공민왕 거문고를 탄주하고 나면 악몽에 시달렸다. 공민왕이 버선발에다 곤룡포는 황금색은 보이질 않고 핏빛이었다. 거문고를 돌려 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보게, 방원이! 내 거문고를 내놓게. 고려를 빼앗아가고도 욕심이 차지 않았는가? 피눈물에 젖은 왕금은 내 분신이니 돌려주게나!”
어느 때는 노국공주가 눈에 피를 흘리며 꿈속으로 나타났다. 몽골 말로 울부짖으며 따라왔다. 황급히 연못에 뛰어들어 허우적거리다가 소스라쳐 일어나면 식은땀으로 온몸이 젖어 있었다.
태종은 도화서에 명을 내려 공민왕이 흰말을 탄 모습을 그렸다. 종묘에서 머지않은 자리에 사당을 지어 봉안하고 길일을 택해 예를 올리도록 하였다. 그 뒤로는 악몽의 빈도가 줄어들다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태종은 정국이 안정되자 공조판서에게 질 좋은 오동나무로 거문고를 9기 만들도록 명을 내렸다. 거문고가 완성되자 먼저 왕위를 물려준 상왕 정종에게 진상했다. 큰형인 진안대군의 기일에 맞춰 거문고를 올렸다. 친구인 길재에게 사양하지 말라는 친서와 함께 거문고를 보냈다.
세월은 쉬지 않았다. 왕은 다시 명을 내렸다. 크기를 다소 줄인 거문고에 아름다운 문양을 넣게 하여 여섯째 아들인 회녕군에게 하사하여 따듯한 부정을 보이기도 했다. 회녕군은 ‘어사금’이라 이름을 짓고 가보로 삼았다.
***
1422년(세종 4년) 비가 귀했다. 5월에 들어서자 비가 늦어 농사에 지장이 많았다. 상왕이던 태종이 병석을 무릅쓰고 기우제를 지낸다고 나섰다. 닷새가 지나자 지쳐갔다.
“내가 죽으면 상제께 가서 내 백성을 위해 비를 내려주십사 하겠노라.”
그의 볼에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성이면 감천인가. 5월 10일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강토를 적시는 해갈의 빗소리를 들으며 역성혁명을 이은 창업의 풍운아가 눈을 감았다.
세종은 부왕이 피바람을 일으켜 닦아 놓은 신흥왕국의 기틀 위에 문화의 대 설계자로 자리매김할 수가 있었다. 세종의 머릿속에는 언제나 백성이 있었다. 중국과 다른 글자를 창제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백성들 간에 말과 글이 통해야 했기 때문이다. 시간도 정확해야 하고 농사의 기본을 알려야 했다. 민초들도 목숨 부지가 아닌 삶이 있어야 했다.
임금은 절박한 고비를 넘기자 음악에 눈을 돌렸다. 불완전한 악기 조율의 정리와 악보편찬의 필요성이었다. 문득 박연이 떠올랐다.
‘그래, 대금을 잘 부시던 스승님이 적임이야. 스승님이.’
앞서 박연은 시강원에서 임금이 세자시절 글을 가르쳤다. 박연은 제자를 위해 잠시 쉬는 시간에 대금을 불어 정서 함양을 도왔다. 세자 충녕대군은 아름다운 소리에 심취하여 기쁜 마음을 키워나갔다.
“스승님의 소리는 정녕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세자저하, 과찬이십니다. 부족하여 송구할 따름이옵니다. 외람되오나 청을 한 가지 올렸으면 하옵니다.”
“스승님, 무엇이든 말씀을 하세요.”
“앞으로 국가의 동량을 뽑으실 때 과거시험의 성적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본바탕이라 여기는 인성을 살펴보심이 더욱 중요한 일이옵니다.”
박연은 하나를 가르치면 두셋을 아는 세자가 성군이 될 것임을 굳게 믿었다. 스승은 성심을 다해 제자에게 공을 들였다.
갑작스런 부름에 박연은 어전에 부복하였다.
“신은 감히 전하께 문후 여쭙습니다.”
“스승님, 그간 강녕하시온지요?”
“전하, 이제는 신에게 그리 부르시면 아니 되옵니다. 거두어 주옵소서.”
어전이 술렁거렸다.
“그대들은 들으시오. 스승을 스승이라 칭하는 것이 법도에 어긋나기라도 한답니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세종 특유의 정면 돌파가 먹혀들어 잠잠해졌다.
“스승님, 아악이 중국을 그대로 모방하여 우리의 정서와는 맞지를 않습니다. 조선에 맞는 아악으로 고쳤으면 합니다.”
“전하, 하명을 받자와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더불어 율관과 편경을 우리에게 맞게 제작하고자 하오니 윤허하여 주시기 바라옵니다.”
“스승님, 고맙습니다. 무엇이든 필요한 것이 있다면 요청하세요.”
“전하, 맹사성(孟思誠) 같은 숨은 인재가 필요합니다. 다른 청이 있다면 전조의 공민왕이 탄주하던 거문고가 수장고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소신이 한번 살펴볼 수 있도록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신료들이 벌 떼처럼 들고나왔다.
“전하, 아니 되옵니다. 저자는 다른 뜻을 품고 있나이다. 대대로 전조에서 녹을 먹었던 집안입니다.”
“전하, 불가하옵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임금의 안색이 푸르게 변했다.
“모두들 참 딱도 하시오. 스승님이 거문고를 앞세워 역심이라도 품는다는 게요. 그리고 이 자리에 선대에서 전조에 녹을 먹지 않은 이가 몇이나 된단 말이오. 야박하게 그러지들 마시오.”
박연은 충청도 영동 사람이다. 호는 난계이다. 1405년(태종 5) 문과에 급제하였다. 집현전교리 ․ 사간원정언 ․ 사헌부지평 같은 출세 가도인 청요직을 두루 지내며 장래의 정승 감으로 주목받았다. 성절사 사절단으로 명나라에 가서 악기와 음률을 살펴보고 돌아왔다. 예문관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각고 끝에 조선의 음률을 바로잡아 연주하게 되었다.
박연은 어릴 때부터 즐겨 불던 피리가 머릿속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그의 예술혼은 영의정보다 음률가로 역사에 남기를 바랐다.
박연은 임금의 허락으로 공민왕의 거문고를 집으로 가져와 마주하게 되었다. 마당쇠에게 사랑채에 보초를 서게 했다. 긴장감이 방안에 가득 찼다. 두 겹으로 싼 거문고의 비단보자기를 벗겼다. 향이 코에 먼저 닿았다. 말총으로 짠 향낭이 숨어 있었다.
덩더덩, 덩더덩
현줄을 누른 손이 부르르 떨었다. 술대를 연이어 당겼다.
‘전조의 거문고라 그런가? 현음도 애달프도다.’
심사를 달래보려고 늘 곁에 둔 피리를 집어 한 곡 불었다.
박연은 여러 악기의 조율에 필요한 편경을 제작하면서 재료인 경석을 경기도 화성에서 채석하여 쓰는 데 성공했다. 중국이 아닌 그의 손으로 편경이 완성되었다.
“전하, 어느 음률은 일 분(一分) 높고, 어느 음률은 일 분이 낮습니다.”
임금은 손수 편경을 살펴보았다.
“스승님, 이것 보세요. 소리가 높은 데에 군더더기가 붙어있어요. 여기서 일 분을 떼어내고 낮은 데는 일 분 붙이면 되리라 봅니다.”
박연은 조회, 회례, 제향아악을 정리하여 궁중음악을 개혁하였다. 세종은 그에게 안장 얹은 말을 하사했다. 이렇듯 군신 간의 돈독한 정리는 훗날 재앙을 불러온 계기가 되었다.
박연의 막내아들 계우(季愚)가 세조의 왕위찬탈에 결사적으로 반대했다가 처형되고 만 것이다. 며느리가 세조의 측근 홍윤성 집안의 노비로 전락하는 참담한 일을 당하게 되었다. 공민왕의 거문고는 다시 궁궐의 수장고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조묵은 꿈결에 거문고를 쓰다듬는 손끝에 반가운 글자가 잡혔다. 당(瑭)이었다. 수심이 가득한 그의 눈에 물기가 가득하였다. 조묵은 환영(幻影)에 놀라 깨어날 뻔했다.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하고 꿈결을 이어갔다.
***
문종은 부왕인 세종이 숙원으로 삼았던 ‘적자왕통’의 의지에 세자로 30년을 지내다가 보위에 올랐다. 안타깝게도 3년째 들어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국은 조선왕조 창업 초기의 피바람이 재연될 조짐을 보였다.
단종은 어린 나이에 부왕의 뒤를 이었다. 삼촌들이 호시탐탐 옥좌를 노렸다. 그중에도 큰삼촌인 진평대군, 아니다. 수양대군의 날카로운 발톱이 길었다. 수양대군은 김종서(金宗瑞)와 황보인(皇甫仁)을 피살하고 성삼문을 위시한 사육신을 몰살하였다. 나아가 단종의 옥좌를 찬탈하기에 이르렀다.
앞서 세종이 미리 수양대군에게 교화를 염두에 두고 석가모니의 일대기인 ≪석보상절≫을 편찬케 하였으나 야욕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더군다나 선대왕의 유훈과 집현전 학사들과의 언약을 저버린 신숙주(申叔舟)의 현실 정치도 일조를 하였다. 발음이 같은 ‘숙주나물’이 잘 쉰다는 속설이 번져나갔다. 창녕성씨(成氏) 가문에서는 숙주나물을 입에 대지도 않았다.
세조는 어리고 여린 단종을 첩첩산중 영월로 유배를 보냈다. 단종 복위 거사를 역모로 뒤집어 왕방연을 금부도사로 삼아 사약을 내렸다. 금부도사는 통한의 시조 한 수를 남겼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세조는 돌아선 민심을 돌리고자 열 명이 넘는 동생들을 십분 활용하였다. 그들의 성향에 따라 선물을 내려 불러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유림들을 포섭하고자 했다. 영해군(寧海君) 당은 세종과 신빈 김씨(愼嬪金氏) 슬하의 6형제 중에 5남이었다. 단종의 삼촌이자 세조와는 이복형제였다. 영해군에게 밀지를 내렸다.
당아, 보아라.
부왕께서 승하하시고 선왕께서는 병약하여 보위를 오래 지키지를 못하였노라. 노산군 홍위(弘暐)가 계승하였으나 너무 어려 김종서와 성승(成勝)과 유응부(兪應孚) 등이 역심을 품어 종묘사직이 위태로워 거사를 도모하였느니라. 사사로이 따지자면 그대는 내게 아우이지 않은가. 모후께서 작은어머니를 대하듯이 짐도 아우를 그리 대할 것이다.
당아.
너는 어릴 때부터 성격이 화목한 것을 따르고 커가면서 거문고 탄주를 좋아하지 않았느냐. 아직도 민심이 수습되지 않고 있어 아우가 짐을 멀리서나마 도와주어야 할 것이야. 이에 집현전의 서책과 전조의 거문고를 어주와 함께 보내니 사양치 말거라. 별도로 살생부에 낙점해서 보내는 중신들의 집을 암행하여 책을 전하여라. 어주로 흥을 돋워 거문고를 탄주하면서 회유에 나서라. 특히 김시습(金時習)과 남효온(南孝溫)을 잘 챙겨 입궐토록 권해라. 다 왕실과 백성을 위함이니라. 이에 밀명을 내리노라.
영해군은 청지기를 불렀다.
“게 아무도 없느냐!”
“네이, 불러계시옵니까?”
“어서 화로에 불을 담아 가져오너라. 어여!”
“나으리께서 어디가 아니 좋으신지요.”
“거참, 말이 많구나. 어여 가져오래도.”
어리둥절하면서 들고 온 화로를 당겨 놓고 청지기를 물렸다. 화롯불을 뒤집어 불씨가 빨갛게 살아나자 밀지를 태웠다. 살생부는 문갑 안에 숨겼다.
영해군은 세상이 싫어졌다. 증조부인 태조의 창업 이래 불어 닥친 피바람이 부왕의 선정으로 끝장나는 줄 알았다. 백성들의 삶을 위해 글자를 만들고 시계를 전하고 농사법을 가르친 부왕을 생각하니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어머니 신빈 김씨의 인자한 모습이 뒤따랐다.
“아바마마께서 승하하시고 짧은 동안 세상이 지옥으로 변하였습니다.”
천지간에 엎드려 숨어 있던 피바람의 광풍이 운집하여 다가오고 있음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었다. 창졸간에 죽은 조카가 떠올랐다. 한탄을 거듭했다.
“홍위야, 홍위야. 너는 어찌 홍매화처럼 그리 빨리도 졌느냐.”
“아, 어찌하여 형님은 내 손에도 피를 묻히라 하는가.”
영해군은 거문고 술대를 찾았다. 주안상이 들자 소주를 연거푸 석 잔을 마셨다. 맨정신으로는 이 밤을 보내지 못할 것 같았다. 취기가 오르자 세조가 대군 시절부터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호위무사가 두고 간 거문고를 펼쳤다.
“이 거문고가 정녕 공민왕의 거문고란 말이지. 정녕코.”
덩더덩, 덩더덩
‘아, 현금의 소리가 이토록 애처로운 것은 망국의 한이 줄줄이 서린 것일까? 내가 무슨 업보로 이 악역을 맡는단 말인가?’
영해군은 밤이 깊도록 술대를 놓지 않았다.
<‘왕금, 피눈물에 젖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