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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스페인/중남미소설
· ISBN : 9788975276194
· 쪽수 : 288쪽
· 출판일 : 2011-03-21
책 소개
목차
알바니아의 사랑
에필로그
옮긴이의 말_폐쇄된 세계의 '남성성'과 '여성성'이 보여준 희망과 절망의 대서사시
리뷰
책속에서
집 문간에서 라일락 색깔의 두꺼운 스타킹을 신고, 젖은 붓처럼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너무 큰 실내복을 입은 채 맨발에 발뒤꿈치를 들고 서 있던 헬레나를 처음 보았을 때 이스마일은 아주 낯선 감정에 빠져들었다.
심한 거부감, 즉 오랜 세월 동안 안정적으로 지속되던 상황이 낯선 사람의 출현으로 갑자기 바뀌어버릴 때 느끼게 되는 그런 특별한 불쾌감이었다. 처음에 이스마일은 그 변화가 정확히 어떤 것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낯선 감정을 의식하며 곰곰이 생각해본 것도 아니었으나, 점차 겁이 나고 불안감에 사로잡히면서 직관적으로 감지했다. 이스마일은 그녀 앞에서 예의를 갖추는 것으로 놀랍고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추려고 했다. 그렇지만 불편한 마음은 여전했다.
“이스마일이군요.”
헬레나가 이스마일을 껴안기 전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두 앞니 사이가 거의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살짝 벌어져 있는 그녀의 이가 반짝거렸다. 헬레나는 이스마일을 복도로 인도해 서재 옆방으로 안내했다. 이스마일이 형과 함께 유년 시절을 보낸 방이었다.
“오후 늦게나 도착할 줄 알았어요.” 헬레나는 방문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 것을 보고 이렇게 사과했다. “잠깐만 기다려요. 열쇠 가져올게요.”
이스마일은 형수가 위층으로 올라갔다 내려오는 그 몇 분 동안에, 죽은 사람의 방은 항상 자물쇠를 채워 놓는다는 알바니아의 미신을 떠올렸다.
자눔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밝히지 않았다. 이 세상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 게 더 좋았을 정도로 끝장을 내는 것이 무엇인지도 말하지 않았다. (……)
빅토르가 무거운 분위기를 바꾸고, 아버지가 침묵을 지키며 지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중압감을 덜어주려고 대화를 시도했다. 그는 이스마일의 경솔한 언행과 나쁜 친구들을 언급했지만, 약간은 감싸는 듯한 목소리로 문제의 심각성을 완화하려 했다. (……)
형수 헬레나 보르스피가 식탁 아래로 왼손을 뻗어 이스마일의 손을 더듬었던 것이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런 단순한 몸짓이 결정적인 행동으로 변해버렸다. 마치 이스마일에게 칼 한 자루를 쥐어주는 것과 같았다. 이스마일은 본능적으로 그녀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가 보았던 것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녀의 눈빛이었다. 이스마일은 평평하지 않은 언덕길을 내려갈 때의 느낌을 받았다. 어둠 속에서 계단을 내려가는데 갑자기 층계 하나가 비어 있을 때와 같은 느낌, 자유낙하를 할 때 느끼는 현기증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스마일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유발하는 희열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을 만큼 명석했다.(……)
심장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팔딱팔딱 뛰면서 부드러운 전율이 온몸으로 퍼져갔다. 호흡이 멈추는 것 같았고, 그 순간에는 모든 장애가 사라졌다. 마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다는 듯이, 당황스러워하면서도 뭔가를 확인하는 것 같은 눈빛으로 이스마일을 관찰하던 담갈색 눈만 존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