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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스페인/중남미소설
· ISBN : 9788975276248
· 쪽수 : 240쪽
· 출판일 : 2012-09-26
책 소개
목차
목수의 연필
옮긴이의 말
리뷰
책속에서
누구에게든 들들 볶아대는 교도소장에게는, 사람들 얘기에 따르면, 수감자들 중 오랜 친구가 하나 있었다. 하루는, 그러니까 ‘산책’이 있던 날, 교도소장이 에르발을 따로 불러 산책자들과의 동행을 부탁했다. 차마 오랜 친구를 자기 손으로 처단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에르발은 그의 말을 들으며 손목시계가 떨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에르발, 고민할 것까진 없잖아. 목소리를 낮추었지만 거드름이 잔뜩 묻어 있는 음색이었다. 그날 에르발은 산책자들과 함께 감방으로 갔다. 화가 양반, 석방입니다. 자정을 알리는 베렌겔라 종소리가 들린 뒤였다. 이 한밤중에 석방이라니? 화가가 못 믿겠다는 눈치로 반문했다. 이봐요, 날 힘들게 만들지 말고 어서 나와요. 어둠에 잠긴 복도 한편에는 프랑코주의자들이 하얀 이를 드러낸 채 히죽거리고 있었다.
그의 시골집에서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그의 눈에 보석처럼 빛나는 게 있다면 딱 두 가지, 하나는 푸른 눈동자에 금발인, 그러나 감기를 달고 살아 콧물을 훌쩍이는 어린 여동생 베아트리스였고, 다른 하나는 어머니가 사용하던 낡은 마르멜로 양철상자였다.(……)
에르발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첫니가 아니라, 가장자리가 녹이 슨 예쁜 양철상자였다. 아니, 상자 뚜껑에 도색된 아가씨, 머리에 핀을 꽂고 하얀 꽃무늬 소매 섶이 달린 붉은 옷을 입고 있는 아가씨였다. 마리사 마요를 처음 보는 순간, 그는 장터를 구경하려고 양철상자를 빠져 나온 아가씨를 상상했다.
에르발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총성을 들었을 때 이미 맥이 풀려버렸다. 아까부터 그는 쭉 뻗은 길 어귀에서 목수의 연필로 포르티코 델라 글로리아를 그리고 있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손놀림이었다.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언어로 그것들을 묘사할 수 있었다. ‘열정’의 악기들을 연주하는 문지기 천사들과 그들의 아름다움이 느껴지나? 그건 고통스러운 아름다움이라고. 그때였다.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그렇게 말한 것은. ‘하느님 아들’의 부당한 죽음을 보고 느낀 우울함을 나타낸 게지. 에르발이 예언자 다니엘을 그리고 있는데, 돌 끝에서 다니엘의 흐뭇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다니엘의 시선을 좇던 그는 이내 그 미소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랬다. 햇볕이 내리쬐는 오브라도이로 광장 쪽으로 마리사 마요가 걸어오고 있었다. 하얀 천으로 덮은 광주리를 손에 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