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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역사소설 > 외국 역사소설
· ISBN : 9791159252983
· 쪽수 : 832쪽
· 출판일 : 2017-11-30
책 소개
목차
제1부 왔노라 VENI
제2부 보았노라 VIDI
제3부 졌노라 VICTUS
『빅투스』의 역사적 근거에 대한 짤막한 노트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 연대기
등장인물_ 『빅투스』의 안팎을 넘나드는 그들의 이야기
옮긴이의 말_ 바르셀로나 1714년 9월 11일
책속에서
도저히 상상이 안 되는 일이었다. 아, 나는 왜 그렇게 멍청했을까. 하긴 일개 하녀가 어찌 그렇게 당당할 수 있었겠는가. 발끝을 덮는 롱드레스 차림의 그녀는 우아한 모습에다 두려운 마음이 들 정도로 차분하고 진지했다.
“아버지께서 그러시더군요.”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대들의 능력을 시험해보라고. 아버지가 이런 기회를 주신 것은 여러분이 아버지 앞에 있다 보면 지레 겁을 먹을 거라는 우려 때문이었어요.” 이어 서류철을 열더니 판화를 꺼냈다. “시험 문제는 딱 한 가지. 그림을 하나 보여줄 텐데, 그 그림에 대해 설명하는 거예요. 간결하게 말예요.”
첫 번째는 나였다. 그녀가 내 눈 앞에 판화를 내밀었다.
지금도 나는 그 사본을 갖고 있다. (에이, 이런 남아프리카 들소 같은 년 봤나. 글쎄 그건 여기다 배치하라니까!)
차라리 아람어로 쓴 시를 보는 게 나았을 것이다. 나는 어색해서 어깨를 흠칫 들어 올리면서도 머릿속에 스치는 이미지를 떠올렸다.
“별이네요. 이파리 대신에 가시가 달린 꽃송이처럼 생긴 별 말입니다.”
곁눈질로 판화를 훔쳐보던 뚱보와 홀쭉이가 배꼽을 잡고 폭소를 터뜨렸다. 그러나 그녀는 웃지 않았고, 이번에는 뚱보에게 보여주었다.
뒤크루아 형제가 성채를 구경시켜 주는 동안에 잔의 침실을 몰래 알아두었던 나는 다들 잠이 들기를 기다렸다. 사실 궁금한 게 많아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나는 등잔불을 챙겨 들고 맨발로 방을 나섰다.
잔의 침실 문을 두드렸다. 기척이 없었다. 더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돌아갈 것인지 망설이는 순간에 문이 열렸다.
어쩌면 어린 나의 치기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기분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내가 ‘겪었다’고 표현한 것은 사랑이란 게 육체적인 고통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장이 오그라들고 평소에는 그렇게도 잘 돌아가던 판단력이 흐트러지면서 손에 든 등잔불까지 부르르 떨렸다.
내가 맨 처음에 본 그녀는 시골 처녀 차림이었고 두 번째는 왕비 같았는데 지금은 다소 헝클어진 머리에 잠옷 차림이었다. 어둠 속에는 우리 둘뿐이었다. 두 개의 불빛이, 그녀와 내가 손에 든 등잔불이 그녀의 속옷을 투영하고 있었다. 나는 이미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준비했지만 결국 입만 헤벌리고 만 꼴이었다.
“괜찮아요?” 그녀가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겨우 마음속의 말을 꺼냈다. “그쪽이 아니었으면, 여기 남지 못했을 겁니다.”
“이렇게 늦은 밤에 숙녀의 침실을 찾은 게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해요?”
“왜 나를 뽑았습니까? 셋 중에서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작정 지원한 사람이 있었다는 거, 그게 바로 나라는 거, 그건 누구나 눈치챌 수 있었거든요.”
“나는 평소에 편한 옷을 입어요. 하지만 그 두 지원자는 하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어요. 아니, 아예 아무것도 안 보더군요. 하지만 당신은 보잘것없는 하녀한테 도움을 청했어요.” 그 대목에서 그녀는 속내를 드러낸 게 계면쩍었는지 복도 좌우를 슬쩍 살피며 화제를 돌렸다. “몇 살이에요?”
당시 나는 두 달 후면 열다섯 살이었다.
“열여덟 살입니다.”
“그렇게 어려요?” 그녀가 깜짝 놀랐다.
그때만 해도 나는 실제 나이보다 열 살은 더 들어 보였고 장년이 되어서는 오히려 스무 살 정도 더 어려 보였다. 그것은 그 ‘미스테어’가 나를 젊은 나이에, 정확히 1714년에 죽이려고 나를 급속도로 성장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그 뒤로도 나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범우주적인 차원의 일을 몇 차례 더 겪었지만 그때마다 나는 내 나이를 더하는 것을 망각한 ‘미스테어’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 있다.
아버지는 당신의 자식을 세상에 도착한 자연적인 존재가 아닌 법률적인 존재로서 책임졌다. 나는 당신의 손찌검과 매질에도, 아니, 그것보다 더한 일에도 항변하지 않았다. 기이하게도 세상에는 몽둥이질을 안 당하는 것보다 포옹을 못 받는 것을 더 불평하는 자식이 존재한다. 내 기억에 당신이 나를 껴안은 것은 딱 한 번, 내 생일날이었다. 그것도 죽은 아내의 대용품으로 자식을 껴안았던 것이다. 그날 당신은 술에 취한 채 짐승처럼 울면서 죽은 아내의 이름을 되뇌었는데 나는 곰처럼 우악스러운 당신 품에서 숨이 막혀 죽을 뻔했던 기억밖에 없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비문명적인 세상은 교육을 위해 땡전 한 푼 저축하지 않았다고. 바르셀로나의 학교들은 이른바 좋은 학교들까지 포함해서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선생들은, 그러니까 케케묵은 사제들은,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를 ‘썩어 문드러질 운명을 지닌 죄인들’로 취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