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아메리카사 > 중남미사
· ISBN : 9788976828422
· 쪽수 : 432쪽
· 출판일 : 2023-12-15
책 소개
목차
서문 7
서론 9
제1장 세계의 자부심과 장식: 선사시대부터 A.D. 1000년까지 23
기원 23
페니키아인, 그리스인, 카르타고인 27
로마 지배하의 히스파니아 31
로마 지배의 황혼기 38
비시고트(서고트) 왕국 40
스페인의 파괴 51
알 안달루스 57
우마이야 제국 60
‘다른 스페인들’ 66
코르도바 칼리프령 74
제2장 기독교도 이베리아의 우위: A.D. 1000~1474 85
우마이야 칼리프국의 몰락 85
알모라비드파의 침입 93
기독교 이베리아반도의 ‘유럽화’ 98
레콩키스타와 십자군 102
알모하드 제국의 흥기와 몰락 108
팽창하는 사회 115
세 종교의 땅 123
이베리아의 정치, 1250~1350 129
왕권과 통치 135
문화적 발전 140
위기와 회복 145
제3장 보편 왕정: 1474~1700 153
가톨릭 공동왕 154
새로운 왕정? 156
재정복의 완결 161
제국으로 나아가다 163
종교적 통일의 탐색 169
합스부르크 왕조의 계승 173
카를 5세와 제국의 수호 177
스페인과 신세계 182
펠리페 2세: 스페인 권력의 정점 188
흑색 전설 197
제국의 피로 198
펠리페 3세와 팍스 히스파니카 200
펠리페 4세와 올리바레스: 위신의 수호 204
사회적·경제적 발전 210
문화적 추세 215
합스부르크 왕조의 최후 218
제4장 계몽 전제군주들: 1700~1833 221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 221
펠리페 5세의 통치(1700~1746) 227
페르난도 6세(1746~1759) 232
카를로스 3세(1759~1788) 236
카를로스 4세와 앙시앵 레짐의 위기 245
부르봉 스페인의 사회와 경제 250
스페인과 계몽사상 260
스페인과 아메리카 제국 261
독립전쟁 266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독립 271
혁명과 반발 273
제5장 자유주의와 반동: 1833~1931 277
인구 변화 277
농촌 사회: 팽창과 침체 278
실패로 끝난 산업혁명? 281
문화의 발전 289
정치적 변화: 자유주의의 부상(liberal ascendancy) 292
장군들의 정치(Praetorian Politics) 297
온건파의 10년 299
‘진보적 혁명’과 자유주의 연합 302
명예혁명과 제1공화국 304
복고 왕정 체제 309
쿠바 재난 312
체제에 대한 또 다른 비판자들 315
교회와 사회 320
자유주의적 스페인의 위기 323
프리모 데 리베라의 독재 체제 328
제6장 현대시대: 1931~2000 335
제2공화국: 개혁의 시기 336
‘암흑의 2년’ 344
내전으로 가는 길 348
스페인의 비극 352
국민군 점유 지역 357
공화 진영 지역 360
공화국의 붕괴 364
승리한 프랑코주의 365
스페인과 제2차 세계대전 371
서유럽의 초병(哨兵) 375
변화와 그 결과 378
민주주의로의 이행 384
중도파의 승리 392
새로운 스페인인들 398
용어 사전 403
연대표 406
더 읽어 보기 420
찾아보기 427
책속에서
8세기 초 무슬림 군대가 반도 내 비시고트 왕국을 멸망시키려고 작정을 했다면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저항 세력을 근절하지는 않았다. 8세기와 9세기에 반도 북쪽에서 일련의 신생 기독교 제후국들(principalities)이 생겨났고, 그것들은 후에 크고 강력한 왕국들로 발전하게 되며, 궁극적으로는 이슬람의 정치적 지배에 도전하게 된다. 1492년 무슬림들의 최후의 거점인 그라나다를 기독교도들이 정복하는 것으로 정점에 이르게 되는 이 길고도 복잡한 갈등과 팽창의 과정을 역사가들은 대개 레콩키스타(Reconquista), 혹은 재정복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용어는 그것이 두 라이벌 종교 간의 항구적인 적대와 갈등 상태를 의미하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점에서 잘못된 명칭이다. 사실 무슬림 영토의 재정복이 항상 기독교도들의 전략적 사고를 지배한 것만은 아니다. 기독교 국가들과 알 안달루스 간의 관계는 결코 항구적으로 적대적이지 않았고, 둘 간의 정치적 동맹도 자주 있는 일이었다.
1556년 즉위 당시 펠리페 2세는 이미 1543년 이래 여러 번에 걸쳐 부왕(父王)을 대신해서 스페인의 여러 영역을 통치한 경험이 있었고, 1554년 잉글랜드의 여왕 메리 튜더와의 혼인 이후에는 ‘여왕의 배우자’로 활동한 바도 있는 경험 많은 지배자였다. 처음부터 스페인은 펠리페 2세의 지배 영역들 가운데 중심이었고, 펠리페 2세는 1559년 네덜란드에서 돌아오고 나서는 한 번도 반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밖으로 나돌며 정력적인 활동을 펼친 부왕과 달리 펠리페는 신중한 태도와 한곳에 머물러 있는 관료제적 통치 스타일로 유명했다. 1561년 그는 반도의 지리적 중심에 가까운 마드리드를 자신의 항구적 수도로 정하고, 2년 후부터는 마드리드에서 북서쪽으로 48킬로미터 떨어진 곳, 과다라마산맥 남쪽 사면에 거대하고 음울한 엘 에스코리알궁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엘 에스코리알궁은 예로니모회 수도원이었고, 학문의 중심이었으며, 또 통치의 중심이기도 했다. 펠리페는 봄과 여름 동안 엘 에스코리알에 있는 집무실에 틀어박혀 있으면서 가능한 한 다른 사람에게 일을 맡기지 않고(그는 사람들을 쉽게 신뢰하지 않았다) 세부사항에 이르기까지 꼼꼼히 국정을 챙겼다. 그 결과 왕은 하루 종일 서류 더미에 묻히게 되었으며, 국왕의 개인비서 곤살로 페레스는 “정책 결정이 너무나 더디게 진행되어서 절름발이도 그것을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다”라고 불평을 토로했다.
프랑스인들이 이베리아반도 대부분을 점령하고, 1808년 5월 카를로스 4세와 페르난도 7세를 강제 퇴위시키고 대신 조셉 보나파르트를 옹립하려고 한 나폴레옹의 조치는 스페인인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지배층은 뒤로 물러나 있었지만 민중들은 1808년 5월 2일 마드리드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중략) 이 지방들의 봉기는 스페인인들이 ‘독립전쟁’이라고 부르는 6년에 걸친 야만적인 전쟁(영국인들은 이를 ‘반도 전쟁’으로, 프랑스인들은 단지 ‘스페인의 궤양’으로 불렀다)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애국자들의 봉기’는 결코 동질적인 운동이 아니었다. 프랑스의 점령에 대항하여 들고 일어선 사람들 중에는 장기적인 정치적·사회적 개혁에 헌신하고 있던 자유주의적 급진주의자, 플로리다블랑카나 호베야노스 같은 계몽주의적 절대왕정의 공복들, 그리고 구체제의 전통적 특권을 완강하게 지지하는 사람들(이들에게 개혁 이념은 저주였다)이 포함되어 있었다. 맨 나중 집단 중에는 호세 데 팔라폭스(Jose de Palafox)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는 1808년 봉기 직후 사라고사에서 개인 독재 체제라 할 만한 것을 수립했다. 이 운동에는 다수의 민중도 참여하고 있었는데, 운동에 대한 그들의 열렬한 지지는 신(神), 왕, 국가에 대한 충성심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전통적인 영주 체제에 억압당해 온 사회적 불만과 증오에 의해서도 추동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