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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79736427
· 쪽수 : 288쪽
· 출판일 : 2024-12-20
책 소개
목차
작가의 말
귀
이옥(李鈺)
설야행(雪夜行)
눈길
개망초꽃
달밤
모텔 파라다이스
사초(史草)
작품 해설_ 불멸의 예술혼에 대한 갈망 / 김경복(문학평론가, 경남대 교수)
저자소개
책속에서
투투 툭.
어디선가 뭔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온 것 같다. 무슨 소리일까? 게슴츠레한 눈을 비벼본다. 투투 툭. 다시 그 소리가 들려온다. 두 귀를 바짝 세워 소리의 행방을 좇는다. 휘청하는 느낌으로 봐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는 아닌 것 같다. 뭔가 무거움에 짓눌려 둔탁하게 허리를 꺾는 소리임이 분명하다.
최북은 숨을 죽인 채 다시 소리의 행방을 좇았다. 두 눈을 다시 비볐다. 시야가 좁아 보였다. 살며시 몸을 일으켜 호롱불을 켰다. 그제야 방 안의 물건들이 제각각 희미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먼발치에 수양딸 옥선의 몸체가 닿았다. 옥선은 잔뜩 몸을 웅크린 채 새우잠을 자고 있다.
그녀는 늘 그런 자세로 잠을 잤다. 어미 뱃속이 그리운 탓일까? 그렇지 않고서야 태반에 들어있을 때의 그 모습을 할 리가 없다. 아비가 곁을 지키고 있어도 늘 외로움을 타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언제 한번 그녀 곁을 오롯이 지킨 적이나 있었던가? 낳고 길러준 것이 아니어도 엄연히 아비는 아비이다.
투투 툭, 투투 툭.
예의 그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최북은 작은 봉창을 열어 흘낏 밖을 내다보았다. 희끗희끗한 여명이 마당 한쪽으로 기어들고 있었다. 어둠 위로 폭설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선반 위의 보퉁이를 내렸다. 가지런히 쌓인 그림들이 드러났다. 가지런한 것을 보니 옥선의 온기를 받은 게 틀림없었다. 맨 밑바닥에 ‘풍설야귀인’이 오롯이 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것 말고는 다 쓰잘데 없는 것들이야.”
다른 것들은 제쳐두고 그것 하나만을 호롱불 가까이 가져가 비춰보았다.
최북은 손바닥으로 그림을 쓰윽 더듬어 보았다. 뭔가 모를 온기가 손끝으로 전해져 왔다. 그림을 다시 찬찬히 훑어보았다.
눈보라 몰아치는 밤길을 헤치고 가는 사람이 둘이다. 눈발 속의 어둑한 풍경이 흐릿하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병풍처럼 우뚝 솟은 산의 위세가 화면을 압도하고 있다. 세찬 눈바람 속에 갇힌 나뭇가지들은 금방이라도 휘어져 부러질 듯 산 쪽을 향해 머리를 풀어헤치고 있다. 눈 덮인 산의 우람한 기세가 으름장을 놓는다.
“단원 그 양반도 이 그림 하나는 건질만 하다고 했었지.”
최북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설야 행 속에는 단 두 사람뿐이다. 나그네와 시동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기세등등한 산의 위용과 산발한 나뭇가지들, 어둠을 들쑤시는 바람 소리와 눈발이 세상을 온통 집어삼킬 듯하다. 나그네는 필시 나일 텐데 저 시동의 정체는 뭔가? 옥선을 눈밭에서 얻은 후였다면 시동 대신에 옥선을 그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무엇 때문에 집으로 돌아오는지 알 길이 없다.
“저 나그네가 나라면 뭣 때문에 눈보라를 뚫고 오두막으로 돌아오는 것일까?”
최북은 누가 들을까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나그네는 그림다운 그림 하나를 얻기 위해 눈보라 같은 세상을 헤쳐가는 최북 자신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도대체 그림다운 그림이 어떤 그림인가? 단원의 말대로라면 혼이 들어간 그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얄팍한 감성으로 그린, 손끝 재주만이 아닌 혼과 지성이 스며있는 그림일지도 모른다.
그림 속의 검둥개는 그악스럽게 나그네를 향해 짖어대고 있다. 글쎄 이놈이 제 주인도 몰라보고 짖어대고 있구나. 그림다운 그림도 못 그리는 제 주인을 타박하고 멸시하는 뜻인지도 모른다. 그 그림은 당나라 시인 유장경의 시를 읽고 나서 그린 그림이었다.
날이 저물고 푸른 산은 아득한데
차가운 하늘 밑 시골집이 쓸쓸하네
사립문 밖엔 개 짖는 소리 들리는데
눈보라 치는 밤에 돌아가는 나그네.
투투 툭, 투투툭.
예의 그 둔탁한 소리가 다시 뒤꼍에서 들려왔다.
최북은 문득 추위 속에 얼어붙은 기억의 실마리를 놓지 않으려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고 보니 저 풍경은 헛것이다. 먹물을 손에 덕지덕지 묻혀 자신이 그렸던 지두화 ‘풍설야귀인’이 아니었던가. 눈보라 치는 밤에 집으로 돌아가는 사내는 곧 그 자신임이 분명하다. 자신은 그 누추한 오두막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검둥개 이놈까지 들어오지 마라 그악스럽게 짖어대고 있다.
“그래, 알았으니 이제 그만 짖어라. 그렇지 않아도 집을 떠날 참이었다.”
최북은 그림 보퉁이를 벽장 속에 넣어두고 옷 보퉁이를 챙겼다. 그림 속의 나그네는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저놈의 검둥개는 아직 멀었다고 사립문 앞을 막고 있다. 그래, 그것은 확실하다. 단원의 말대로 지금까지 자신이 그린 그림들은 모두 가짜고 헛것이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너무 비참해질까 봐 ‘풍설야귀인’ 하나만 거론해 억지로 치켜세운 것이 분명하다.
―「설야행(雪夜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