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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역사소설 > 한국 역사소설
· ISBN : 9788983944993
· 쪽수 : 348쪽
· 출판일 : 2008-11-17
책 소개
목차
굴레의 칼
한판 승부
묵향 속의 서리국화
춘설헌
서치홍포 화두
그 속에 대답이 있으리니
빛 속의 어둠
낮에 뜬 반달
개망나니
억만재에 부는 바람
덤불 속의 화혼
대왕의 눈물
그 너머의 세계
샤라쿠의 망령
도주
올가미
뻗밭 속의 생
청금상련
구름과 비
다음 생에
홍도의 유령
정사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그때까지도 그는 사태 파악을 제대로 못 하고 있었다. 포졸들이 몰려와 윤복을 잡아다 형틀에 눕혔다. 윤복의 엉덩이를 깐 다음 포졸들이 사또를 쳐다보았다.
“이 환쟁이가 그림을 그린다고 할 때까지 매우 쳐라!”
이내 곤장이 윤복의 볼기짝으로 사정없이 떨어졌다.
“으아악!”
곤장질이 계속될 때마다 윤복의 비명소리가 높아졌다. 보다 못한 최북이 고함을 질렀다.
“정말 애를 죽이려고 그러시오?”
“그러니까 그림을 그리면 되는 것 아닌가.”
“좋소이다.”
“그리겠다?”
“애나 풀어주시오.”
“여봐라. 애를 풀어주어라.”
아전이 화선지와 벼루를 내왔다. 그가 메고 있던 필통에서 붓을 꺼내 들었다. 사또는 도대체 어떤 그림을 그릴지 궁금해서 그를 멀거니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최북은 붓을 거꾸로 잡고 부들부들 떨었다.
“왜 붓을 거꾸로 잡고 있는가?”
사또가 이상해서 물었다. 그가 사또를 쳐다보았다.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생각 중이외다.”
“아하, 무슨 그림을 그릴까 생각 중이시다? 그런데 왜 눈물을 흘리시는가.”
“내 마음이외다.”
사또가 무릎을 쳤다.
“역시 명인이로다. 얼마나 감정이 풍부했으면 금세 눈물이 맺히겠는가. 부디 좋은 산수를 그려주시게.”
“물론이오. 이게 바로 그대에게 바치는 산수외다.”
그렇게 말하고 그는 돌연 손에 거꾸로 잡은 붓으로 자신의 눈을 찔렀다. 거꾸로 잡은 붓 대가리가 푹 눈에 꽂혔다. 피가 철철 눈에서 흘러나왔다. 그는 붓을 뽑아들고 소리쳤다.
“사또, 이게 최산수요. 한 장을 더 그려드릴까?” - 본문 96-97쪽 중에서
“이제야 분명히 이해를 하겠군요. 그분에게 절 보낸 이유를…….”
윤복이 그림을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스승님은 어떻습니까? 그 그림이 보이시는지요?”
김홍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표암 스승의 말처럼 내 존재가 가장 빛나던 순간에, 아니 가장 황홀하게 빛나던 순간에 그게 보이더구나.”
“정말 모르겠군요. 여기 무슨 그림이 또 있다는 것인지. 정말 무엇인가 그려진 그림이 보인단 말씀입니까?”
김홍도가 웃으며 다시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대답했다.
“그렇다.”
“무엇입니까? 그게.”
김홍도는 고개를 내저었다.
“최북 스승이나 표암 스승도 결코 그 해답을 내게 주지는 않았느니라. 하지만 그것은 유혹이니라.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무서운 유혹. 그 유혹은 내 영혼을 사로잡고 미의 마성에 빠지게 했으며 오랜 세월 나를 매질하는 선생이었느니라. 칼이었느니라. 조금의 용서도 없는 칼이었느니라. 그리하여 가장 본질적인 것만 남기게 하는 무서운 칼이었느니라. 나중에야 알았다. 그 속에 모든 것이 있다는 것을. 그것은 절대의 세계, 궁극의 세계였느니라. 그 세계에 이르지 않고는 나타낼 수도, 볼 수도 없는 세계이며 그렇기에 그것을 텅 빔의 유혹이라고 하느니라.” - 본문 118-119쪽 중에서
“그렇다면 터럭 같은 삶을 털어야 하겠구먼. 에이, 더러운 화상.”
최북은 그렇게 내뱉고는 홱 문을 열고 나섰다. 그는 나오다가 윤복을 싸늘하게 쏘아보았다. 홍도가 뒤따라 나와 최북의 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어허, 천하의 단원이 왜 이러는가? 이름 석 자로도 모자라 이 늙은이를 진정 모욕할 생각인가?”
“어르신, 서치홍포 화두를 저놈에게 내려준 이가 누구입니까. 바로 저놈에게 내려주신 화두가 아닙니까?”
그제야 최북이 으하하 웃었다.
“서치홍포 화두라, 그거 재미있군 그래.”
짐작이 간다는 듯이 최북이 말했다.
“어느 날 저놈에게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때 어르신께서 그린 그림을 보면서 표암 사부께서 말씀하셨지요. ‘이 그림이 바로 최북이 그린 서치홍포다. 쥐와 무가 있는데 또 다른 그림이 그려져 있다고 한다. 내 너에게 물으니, 보이느냐? 보인다면 일러라.’ 그런데 저는 아무리 보아도 보이지 않더이다.”
“그래? 지금은 보인다?”
최북이 물었다.
“어찌 저놈 스스로 깨우쳐야 할 대답을 제가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사구(死句)가 아니겠습니까. 죽은 대답 말입니다. 그 대답을 진정으로 알고 있는 이는 그 그림을 그린 어르신이 아니십니까.”
“그래서 저놈을 데려가 가르치라?”
“어르신. 그래서 그런 의혹도 주신 거 아닙니까.”
“잡소리 치우고 길을 비키게.”
최북은 그대로 대문을 나섰다. 김홍도는 황급히 미리 싸둔 봇짐을 들고 나와 윤복에게 안겼다.
“어서 따라가거라. 가라고 해도 돌아서지 말고 발길질을 해도 차여라. 돌을 던져도 피하지 말고 매질을 해도 맞아라. 그러다 보면 분명 깨닫는 바가 있을 게다.”
홍도는 그렇게 말하며 윤복을 밀었다. 얼떨결에 윤복은 최북을 따랐다. 앞서가는 최북의 모습이 꼭 사나운 바람 같았다. 깃발처럼 그의 옷자락이 휘날렸다. 윤복이 따르자 그는 몇 번 돌아서서 호통을 치다가 나중에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이 놔둬버렸다. - 본문 84-85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