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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사회과학 > 사회학 > 사회학 일반
· ISBN : 9788984075511
· 쪽수 : 211쪽
책 소개
목차
들어가면서
제1장 시민이란 무엇인가?
시민의 탄생 | 민주주의의 함정 | 모범 시민의 필수 조건
제2장 19세기의 복잡한 사상 지도
자유주의의 진짜 얼굴 |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 제국주의의 그늘
제3장 좋은 나라를 향한 열망 : 1980년대 경험
한국과의 첫 만남 | 모든 것이 경제를 위하여 | 격변의 1980년대
제4장 문화 정체성과 조화 : 일본 시절
일본의 우치·소토 문화 | 인권과 공산당의 관계 | 어제와 오늘이 공존하는 도시 | 튼튼한 정체성의 기둥과 공동체 의식 | 희망을 말하는 위기의 1990년대
제5장 존재를 부정하는 사회 : 서울대 시절
무관심을 권하는 사회 | 경쟁 지상주의 교육을 넘어 | 서촌의 발견 | ‘즐거이 언어를 배우는 곳’
제6장 사람의 가치는 얼마인가? : 고향에서 다시 한국을 생각하니
보존 운동의 변화 | 사회적 자본이라는 프리패스
제7장 21세기의 한국인
선진국의 우울 | 사라진 개천의 용 | 인류의 오랜 숙제, 부의 분배 133 | 과거와의 결별에 익숙한 세대 | 희망은 요구하는 자의 것
제8장 ‘제3의나’와 한국인
언어의 한계는 곧 세계관의 한계 | 19세기의 요청, 민족주의 | 열린사회의 적들 | ‘제3의 나’를 만드는 기둥
제9장 미래 시민의 조건
개인주의 세대의 부상 | 젊은 세대의 민주주의 소비법 | 집중에서 분산의 구조로 | 시민, 진화한 민족의 형태
마치면서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민주주의의 근본은 시민이 공동체의 주인이기 때문에 민주주의 성패와 미래가 시민의 손에 달려 있다. 지미 카터 민주당 후보는 1976년 대통령 선거에 나오면서 ‘시민만큼 좋은 정부’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다소 애매한 표현이지만, 이것은 시민의 중요성을 전달하는 말이다. 즉 시민이 ‘좋으면’ 정부도 자연스럽게 좋아질 것이다. 또한 영어의 ‘idiot’(바보 또는 멍청이)는 고대 그리스어의 ‘무식한 사람’이라는 말에서 나왔다. 그리스에서 무식한 사람은 공동체에 대해 관심이 없고 공동체의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이다. 즉 시민으로서 공동체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도 않고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바보라는 의미이다.
- ‘시민이란 무엇인가?’에서
나는 미시간대학교에서 응용언어학 석사를 받고 1986년에 육군종합행정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게 되었다. 학생은 모두 육사를 졸업한 젊은 장교들로, 학생 기숙사는 교사 숙소와 같은 건물이었다. 장교와 친해지면서 또 다른 한국을 만났다. 1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이들에게 군인이 되는 것은 정치적 성향이나 신념보다 출세하기 위한 도구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전두환 대통령도 개인보다는 그가 대표하는 안정감과 거기에서 나오는 기대 때문에 버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즉 당시의 고도성장 효과 덕분에 어렵게 살아온 많은 사람의 생활이 물질적으로 좋아지고 있었고,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전두환의 독재를 참으면서 지냈던 것이다. 결국 전두환은 경제 때문에 버티었고, 경제 성장과 사회적 안정이 보수적 정치의 바탕이 되어 그 패러다임은 오늘날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 ‘좋은 나라를 향한 열망’에서
이 시대 한국의 빠른 변화를 볼 수 있었던 것도 귀중한 경험이었다. 1982년, 그해 여름에 처음 만난 한국은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독재자가 대통령이었고, 민주적 선거를 실시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그러나 한국을 떠난 1993년 여름에는 32년 만에 민주적 선거를 통해서 민주화 운동의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인 김영삼이 대통령이었다. 경제 성장으로 생활수준이 올라가면서 생활 방식도 많이 변했다. 버스 안내원이 없어졌고 단독 주택이 많이 사라지면서 지금의 서울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많은 변화의 동력은 더 ‘좋은 나라’를 만들자는 공감 때문이었다. 그 공감대가 보수, 진보, 기득권, 서민을 다 아울러서 매우 튼튼하고 넓었다. 또 ‘좋은 나라’의 기준에 대한 이해가 같았는데, 그것은 ‘잘사는 자랑스러운 민주 국가’였다. 이제는 그 목표를 달성했는지를 함께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 ‘좋은 나라를 향한 열망’에서
여기저기 이야기하면서 알게 된 것이 일본 문화의 독특한 ‘우치(內)’와 ‘소토(外)’였고, 그 속에 흐르는 집단주의였다. 즉 내부 사람과는 긴밀한 관계를 갖고 지속적으로 유지하려 하지만, 외부 사람은 거리를 두면서 상황에 맞게 관계를 조절한다. 교양 영어를 가르치는 교수는 학생의 입장에서 외부 관계의 사람이어서 학점에 예민한 학생은 예의 바르게 대하지만, 그렇지 않은 학생은 예의를 지킬 생각이 없어 수업 시간에 떠들거나 자거나 잠을 자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학생도 전공 분야 교수와는 졸업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좋은 관계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전공 교수에게는 예의 바르게 대할 것이다. 그동안 많은 한국 사람으로부터 “일본 사람의 속마음을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속마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마음이 상황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닌가 싶다.
- ‘문화 정체성과 조화’에서
한국에서 살 때는 ‘외국인’ 혹은 ‘서울대 교수’라는 명백한 틀 안에서 나의 사회적 자본도 그만큼 이해하기 쉬웠고 활용하기도 쉬웠다. 명함을 던지면 문이 열렸다. 그런데 앤아버에 와서야 사회적 자본이 애매한 한국 사람의 어려움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 애매함 때문에 압박을 받아 인생의 가치관이 왜곡되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알았다. 1997년 갑자기 닥쳐온 경제 위기 속에 구조 조정으로 인한 해고가 사회적으로 왜 그렇게 어려웠는지, 왜 SKY 대학을 입학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한지를 새삼스레 알게 되었다. 스펙을 따야 한다는 제도 자체가 사회적 자본을 불공평하게 분배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젊은 세대의 분노도 이해할 수 있었다.
- ‘사람의 가치는 얼마인가?'에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국 사람이 지배 계층에 진입하고 싶어 하는 이유이다. 한국의 긴 역사를 보면 항상 지배 계층이 적고 대신 그 밑에 어렵게 사는 백성이 많았다. 이것은 인류 역사의 보편적 현상이기도 하지만, 한국은 유럽이나 일본처럼 지배 계층이 다양해지면서 여러 권력 사이의 경쟁이 많지 않았다. 지배 계층과 백성, 그 뚜렷한 구별이 현재 ‘강남’과 서민이라는 말에 반영되어 있다. 즉 ‘강남’은 행정 구역보다 지배 계층의 사회적 자본을 말하는 것이고, 서민은 그렇지 못한 대중이다. 예전에 서민은 어렵게 살았고 지금도 그런 면이 없지 않지만, 살아가는 데 어려운 것보다 불안하게 살기 때문에 ‘강남’으로 진입하고 싶어 한다. 2014년의 세월호 참사는 서민의 불안의 상징이 되었고, 정부의 늦고 무능한 대응 때문에 분노가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이미 ‘강남’에 진입한 사람은 서민의 불안을 알기 때문에 ‘강남’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사회적 자본에 더 예민하고 더 많이 가지려고 한다. 결국 두 계층 모두 불안해하는데, ‘있음’과 ‘없음’의 차이이다.
- ‘21세기의 한국인’에서
한국은 일본과 달리 독재 정권 때문에 부와 권력 분배가 더 늦게 온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민주화 운동이다. 그 운동은 4·19 혁명에 뿌리가 있고 독재 정권의 억압을 받으며 계속 민주화를 위해 애써왔다. 핵심은 말 그대로 민주화인데, 그것은 자유선거, 표현의 자유 그리고 인권 존중이었다. 1987년 직선제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고 그 후 자유선거를 치르면서 민주화 운동은 성과를 얻고 1997년에 역사상 첫 번째 평화적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미국의 흑인 인권 운동처럼 제도적 문제를 해결하면서 더 깊은 심리적 문제까지 해결된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한국의 경우 자유선거가 성공하면서 더 뿌리 깊은 인권과 권위주의 문제에 대한 관심이 사라졌다. 그러한 맥락에서 권력과 부의 집중, 즉 ‘강남’의 분배에 대한 관심이 사라졌다. 물론 노무현 대통령이 제안한 세종시 건설과 같은 노력이 있었지만, 사회 전반에 걸쳐 ‘강남’의 지배가 계속되었고 2010년대에 들어오면서 ‘강남’과 서민의 격차는 오히려 더 커졌다.
- ‘21세기의 한국인’에서
현재 한국에서 변화를 요구하는 세력은 아직도 1980년대의 ‘독재 타도’ 방법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비전을 제시하면서 그에 대한 공감대를 만들지 못하고 감정적 사건에 반응하거나 감정적 이슈를 찾아내어 떠든다. ‘강남’의 특권을 유지하는 세력은 이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무시하고 버티면 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1980년대식의 가두시위나 2000년대식의 촛불 집회가 아니라 선거를 통해 승리하는 것이다. 아주 단순한 이야기지만, 변화를 요구하는 세력이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더 심각한 문제를 암시하고 있다. 인터넷과 SNS 시대에 광화문에서 100만 명이 모여 ‘민의’를 보여줘도 영향력이 별로 없고 오히려 부정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변화를 요구하는 세력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낡은 1980년대 투쟁 방식의 틀에서 벗어나 어렵게 도입한 자유선거를 통해 승리한 뒤 시민의 대표 자격으로 변화를 실현하는 것이다.
- ‘21세기의 한국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