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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84315297
· 쪽수 : 328쪽
책 소개
목차
프롤로그
1부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된 노래
2부 너와 내가 한 소절씩 나눠 부르던
3부 영영 끝나지 않을 이 노래
에필로그 -차마 못한 말
작가의 말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복순은 옛날이야기나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해 자주 말했다. 두자는 언니들에게 ‘나중에’라던가 ‘이다음에’로 시작되는 말을 별로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언니들은 늘 지금 해야 할 것, 내일 아침에 해야 할 것, 혹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마루 좀 훔쳐라. 옥수수 좀 빻아라. 요강 좀 부셔라. 내일 새벽 일찍 산에 가야 해. 나물 삶은 건 절대 아버지 밥그릇에 담으면 안 돼. 장수 좀 업어라. 할머니 좀 모셔 와라. 두자는 언니들이 세상에서 제일 좋았지만, 좋아하는 마음 곳곳엔 원망과 미움도 숨어 있었다. 그런 감정이 도대체 왜 생기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언니들이 할머니처럼 무조건 아버지와 장수 것을 먼저 챙기는 것을 볼 때마다, 속 깊은 곳에서 눈물로 똘똘 뭉쳐진 잿더미가 울컥 올라와 목구멍을 꾹 누르는 것 같았다. 자기는 아무에게도 특별하지도 귀하지도 않다는 생각이 스스로를 볼품없이 만들곤 했는데, 그건 언니들 역시 마찬가지니까 그들을 원망하거나 미워하기도 싫었다. 그 때문인지 좋아하는 티 한 번 내지 못하고 살다가 언니들을 보내버렸다.
나는 현모양처가 되어야 해. 복순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자기 엄마가 아침마다 니는 꼭 현모양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랬다. 자기 언니들도 결혼해서 모두들 현모양처가 되었다고 했다. 두자는 현모양처가 뭔지 몰랐다. 그저 결혼만 하면 저절로 되는 건가 보다 하고 짐작할 뿐이다. 그럼 우리 언니들도 모두 현모양처가 되었나? 두자가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복순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그건 그렇게 쉬운 게 아냐. 일단 좋은 집에 시집을 가야 돼. 그리고 꼭 아들을 낳아야 돼. 안 먹어도 배부르고 마른 땅에서도 곡식을 뽑아낼 줄 알아야 해. 절대 큰소리를 내어선 안 돼. 울고 싶으면 부엌에서 불 피울 때나 혼자 몰래 울어야 돼. 세상이 망해도 가족들 밥상은 삼시 세끼 차려낼 줄 알아야 하고. 복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자는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그게 어디 사람이나. 무당을 불러내 때려잡아야 할 귀신이지. 우리 언니들은 절대 그거 되면 안 되겄다.
손님은 끊임없이 밀려들어왔고, 수십 종의 담배와 술과 삼각김밥과 컵라면과 생수를 파는 동안 나는 내가 첫사랑의 이름을 잊었다는 사실마저 잊고 말았다. 가늘고 긴 손가락. 철렁, 하던 그물.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골대 위를 제외한 모든 하늘이 찬란하게 붉었던 그 여름의 저녁. 책상 밑 누런 박스 안에 포장된 그대로 들어 있을 전람회 앨범 역시, 머지않아 형체 없는 재가 되고 말 것이다. 숨이 막힌다. 삼만 초에 한 번 숨을 쉬는 블루 플라이처럼. 후웁. 후웁. 후웁. 그 애는 잘 살고 있을까? 군대는 다녀왔을까? 나를 기억할까? 내 이름을, 알고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