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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84317338
· 쪽수 : 336쪽
책 소개
목차
프롤로그
1장 나이를 재는 소년
2장 잔치가 시작될 무렵
3장 문장을 만나다
4장 기록을 위한, 기록에 의한
5장 도시의 무덤
6장 신기루, 그림자
7장 잔혹한 여행
에필로그
해설 - 푼크툼, 문명에 찍힌 얼굴 (정은경 문학평론가)
작가의 말
저자소개
책속에서
시우에게도 삶의 목표라는 게 있다면 바로 이것이었다. 누군가가 아침에 눈을 뜨는 즐거움이 무엇이냐고 물어온다면 서슴지 않고 바로 이 순간이라고 말할 것이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 맨발로 자작나무 숲으로 달려갔다. 자작나무에 두 발을 모으고 기대어 서서 숨을 골랐다. 그리고 나이를 쟀다. 머리끝이 머무는 지점에 때 낀 손톱을 눌러 표시를 했다. 나이는 매일 자랐다.
자작나무에 대고 나이를 재기 시작한 것은 우연이었다. 자꾸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는 자작나무를 올려다보다가 자신도 나무처럼 자라는지 궁금해졌다. 시우가 느끼기에 몸은 매일 그대로인 것처럼 보였다. 자작나무에 발뒤꿈치를 바싹 붙이고 섰다. 머리끝이 닿는 부분에 대고 손톱으로 표시를 했다. 그 다음 날 같은 방법으로 표시를 했다. 어제와 달라지지 않았다. 그 다음 날도 그 그 다음 날도 매일같이 쟀다. 처음에는 같은 위치에 머물러 있던 표시가 아주 조금씩 그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신기하고 흥분되었다. 자작나무처럼 자라고 있다고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한편으론 은근히 걱정도 되었다. 자작나무보다 훌쩍 커버리면, 이 숲에서 시우가 가장 크면 그다음에는 어디다 대고 손톱으로 표시할까 조바심이 일었다. 그리고 알지 못했다. 자작나무에 대고 재는 게, 매일매일 크는 게 ‘키’라는 사실을. 손톱으로 표시할 수 있는 건 나이가 아니라 키란다, 아무도 바로잡아주지 않았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키를 재든 나이를 재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보다 중요한 건 비밀을 간직하는 것이었다. 시우도 어느덧 은밀함을 즐기고 싶은 나이가 되었다.
한 번도 숲을 벗어난 적이 없는 시우에게 숲만큼 거대하고 대단한 존재는 없었다. 숲이야말로 시우의 전부였다. 움막에 없는 게 숲에는 있었다. 나무가 있고 버들피리가 있고 이슬이 있고 청설모가 있고 열매가 있고 바람이 있고 토끼도 있었다. 시우는 도토리 열매를 주우며 셈을 익혔고, 심심할 때는 길게 늘어진 나뭇가지를 잡고 이쪽 나무에서 저쪽 나무로 옮겨 다녔고, 피곤하면 나무 아래서 잤다. 잠에서 깨어나 배가 고프면 칡뿌리를 캐 우물거렸고 배가 부르면 바위 위에 올라가 노래를 불렀다. 노래가 끝나면 나뭇잎들이 바람에 일제히 흔들리는 모습이 마치 자신을 향해 갈채를 보내는 것 같았다. 시우에게 숲은 없는 게 없는 곳이었다. 모르는 것투성이어도 슬프지 않았다. ‘키’와 ‘나이’ 같은 것을 몰라도 자작나무가 있으니 다행이었다. 그 사실을 린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니 자꾸 골치 아픈 얘기는 그만하라고.
사냥은 힘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기 싸움이었다. 상대방의 마음을 먼저 읽는 쪽에 승리가 돌아갔다. 노파는 모든 만물에 마음이 있다고 믿었다. 배를 곯는 들짐승은 물론 나무와 바람과 흙과 햇살에도 마음이 머문다고 생각했다. 그것들이 모여 숲의 넉넉한 마음이 생겨났으니 늘 고맙고 미안했다.
사냥은 마음과 마음이 다투는 장이었다. 잠시라도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되었다. 지금 시우의 행동은 어수룩하고 방만했다. 토끼는 절대로 그냥 덫에 걸리지 않았다. 덫에 걸리기만을 기다리기 전에 토끼의 예상 경로를 미리 차단하는 게 중요했다. 가만히 앉아 무엇인가, 그것도 펄펄 살아 움직이는 생명이 덫에 걸리기만을 기다리는 것은 인간의 오만이었다. 그들도 제 나름의 생각이 있고 오기가 있다는 걸 인간들은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