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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84318984
· 쪽수 : 432쪽
책 소개
목차
폭설
새날들의 시작
검은 보랏빛 바다의 중심
아버지
세기말
정체성
블랙홀
여름의 끝
소유와 유랑으로부터의 자유
반역
빈 중심
개정판 작가의 말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그러나 삶이란 끝이 없다. 삶이 계속되는 한 어느 날 갑자기 우리들 뒷덜미를 사정없이 잡아채어 수렁 속으로 내던지고 마는, 악마의 손길 같은 삶의 어두운 변수는 결코 끝나는 법이 없는 것이다. 왜 그때는 그걸 예상하지 못했을까. 평생 동안 배운 대로, 혹은 윗사람이 지시하는 대로, 융통성 하나 없이, 오로지 근면 성실하게, 조심조심 살아온 내 삶의 보편적 관성으로 보건대, 내가 장년의 연대에 만났던 의미심장하고 잔인하고 재빠른 변화는 나 스스로도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아마도 나는 그때, 뭔가에 씌어 일생을 통해 일관되게 둘러치고 살았던 나의 방어벽을 자청하다시피 허물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확실히 예감하진 못했으나, 그때 이미 나는 내 앞에 은밀히 놓인 덫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삶이란 때로 그렇다, 평온하고 안정된 삶일수록 은밀히 매설된 덫을 그 누구든 한순간 밟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어쩌면 생의 심연이 지닌 본질적이고 절대적인 권한일는지도 모르겠다. 생이라고 이름 붙인 여정에서 길은 그러므로 두 가지다. 멸망하거나 지속적으로 권태롭거나.
어떤 이는 숙명이라고 부른다. 그 당장엔 우연처럼 일어나 우리들을 끝없이 번민시키고 또 분열하게 하는 것, 그렇지만 종국엔 아퀴가 딱 맞춰진 듯 옴짝달싹할 수도 없게, 우리가 거기 좌초할 수밖에 없었다고 느껴지도록 하는 것, 합리주의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으나 이렇게 저렇게 오감 열고 느끼면 제 몫몫, 원인과 결과,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짝을 채워 제자리 찾아 앉는 것, 인생을 나는 보다 모던한 말로 예비된 프로그램이라 부르고 싶다. 살다 보면 누구나 두 갈림길에 놓이게 마련이라고 어떤 시인은 읊었거니와, 그것이 두 갈림길이 아니라 세 갈림길, 또는 열 갈림길, 백 갈림길이라 할지라도 그 길의 초입에서 느끼는 혼란과 분열일 뿐, 결국 그 길을 다 통과해 지나오고 나서 돌아보면, 그렇고 말고, 그 모든 길은 다만 하나로 이어진 어떤 불가항력적 프로그램 속에 입력된다. 그것이 인생이라는 이름의 미로 게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