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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일본소설 > 1950년대 이후 일본소설
· ISBN : 9788984374331
· 쪽수 : 456쪽
· 출판일 : 2021-09-23
책 소개
리뷰
책속에서
5년 전, 집을 나와 도쿄로 간 건 시오리의 인생에서 가장 파격적인 ‘도망’이었다.
시오리는 기후현 다지미시의 그저 그런 가문의 장녀로 태어났다. 집은 좁은 상자 그 자체였다. 어린 시절에는 아무런 제약 없이 자랐지만 부모가 남동생을 낳을 수 없다는 게 기정사실이 되면서 감당하기 힘든 의무를 떠안게 되었다. 고바야시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덤으로 데릴사위를 들여 토지와 집안을 지키면서 대를 이을 후손을 낳아야 한다는 책임이 부과되었다.
부모는 시오리에게 가문의 후계자는 피아노, 다도, 서예, 영어 회화를 두루 배워야 한다면서 가정교사를 붙여 주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과 노는 건 일절 허용되지 않았다. 고바야시 가문을 대표하려면 훌륭한 인품과 교양을 겸비해야 하기에.
시오리는 가문의 후계자가 되는 건 바보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 뼈대 있는 가문이라고는 하지만 달랑 대를 이어 지켜온 집이 한 채 있을 뿐 그다지 명문가도 아니었고, 내세울 만한 족적이 있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평범한 공무원이었고, 어머니는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가정주부였다.
어느 누가 이 보잘것없는 가문을 지키기 위해 모든 걸 포기하고 집 안에 틀어박힐 수 있겠는가?
이치카와 히로유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고스케가 <레테>를 설립한 계기가 되었던 말이었다.
‘고스케 씨는 선한 의지가 강한 분입니다. 자살하려는 사람들을 돕는 데 가장 이상적인 분이지요.’
고스케는 어린 시절부터 착한 아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친구가 장난감을 빌려달라고 하면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빌려주었고, 두 살 위 누나가 그의 손 안에 있는 젤리를 달라고 할 때도 지체 없이 건네주었다. 친구에게 빌려준 장난감을 돌려받지 못하거나 젤리를 먹지 못하는 것보다 상대방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게 훨씬 더 즐거웠기 때문이었다.
고스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너무 착해서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6명이 해야 하는 화장실 청소를 혼자서 하다가 학생주임에게 발각되었다. 아이들에게 집단 괴롭힘을 당한 건 아니었고, 모두들 화장실 청소를 싫어해 그냥 혼자 했던 것뿐이었다. 고스케는 한사코 좋아서 한 일이라고 주장했지만 그의 부모는 학교를 찾아가 부당한 처사라며 따지고 들었다. 그 결과 다른 아이들의 부모가 학교로 찾아와 사과하는 불상사가 빚어졌다. 고스케는 그때 아무리 선한 의도로 한 일이라도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구루미는 스트레스가 쌓이면 발등을 커터로 그었다. 발등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모습을 찍어 트위터에 올린 적도 있었다. 물론 10초 만에 실수라는 걸 깨닫고 사진을 내렸다. 만약 그대로 놓아두었더라면 생각만으로도 아찔한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구루미는 트위터를 나와 인스타에 접속했다. 케이크바이킹의 쇼트케이크, 선샤인수족관의 펭귄, 호텔 미라코스터에서 미키의 귀를 붙이고 얼굴을 애플리케이션으로 장식한 여자아이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독특하고 매력적인 사진들이 저마다 반짝이는 빛을 발하며 ‘좋아요’를 눌러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구루미는 ‘좋아요’를 누르는 것에 인색하지 않았다. 자신만만하게 사진을 찍어 올리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구루미는 재수생이라 대학생 친구들이 올린 사진을 보면 홀로 동떨어진 느낌이 들어 기분이 울적했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수학 참고서를 펼쳤다. 수학 과목은 수학이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영역이 있어서 좋았다. 허수는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숫자인데 수학에서는 있다고 가정하고 계산하는 게 흥미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