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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영미소설
· ISBN : 9788984374492
· 쪽수 : 500쪽
· 출판일 : 2022-08-16
책 소개
리뷰
책속에서
주드와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았다. 엄마 아빠의 대화를 엿들으려고 텔레비전은 일부러 켜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이 주고받는 성난 속삭임은 해독 불가였다. 주드가 자기 접시를 챙겨오지 않아 내 피자를 한 입씩 나눠 먹었다.
“나는 할머니가 아주 굉장한 말을 해줬을 줄 알았어. 천국에도 바다가 있다든지 말이야.” 주드가 말했다. 나는 소파에 등을 파묻었다. 주드와 단둘이 있는 것만으로도 안심이었다. 주드와 함께 있으면 인질이 된 기분 따위는 들지 않는다.
“아, 맞아. 천국에도 바다가 있어. 다만 보라색이지. 모래는 파란색이고 하늘은 끝내주는 초록색.”
내 말에 주드가 씩 웃으며 잠시 생각했다.
“밤이면 각자 꽃으로 기어들어서 잠들어. 낮에는 다들 소리 대신 색깔로 이야기하고. 그래서 완전 조용해.” 주드는 눈을 감고 이어서 천천히 말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불꽃처럼 타오르지.”
주드는 이 상상 놀이를 좋아했다.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놀이이기도 했다. 꼬마였을 때 우리가 이 놀이를 하면 할머니는 “날 데려가!” 혹은 “여기서 당장 날 꺼내다오, 얘들아!”라고 외쳤다.
눈을 뜨는 순간 주드의 얼굴에서 모든 마법이 사라졌다. 주드는 한숨을 쉬었다.
주드가 내 옆을 파고들어서 나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이게 우리다. 우리의 공식 자세. 일명 한 덩어리. 엄마 배 속에서 찍힌 초음파 사진에서도 이 자세였고, 어제 프라이가 찢어버린 그림에서도 이 자세였다. 지구상 흔한 동기간과 달리 우리는 첫 세포부터 함께였고 이 세상에 나올 때도 함께였다. 그래서 남들은 우리 둘이 할 말을 주드가 대표로 한다는 사실을 딱히 눈치채지 못한다. 우리가 피아노를 칠 때 두 손이 아닌 네 손으로만 칠 수 있으며, 가위바위보를 할 때 13년을 통틀어 한 번도 다른 걸 낸 적 없다는 사실도. 언제나 바위 둘, 보 둘, 가위 둘이다. 나는 우리를 이 자세로 그리 지 않으면 아예 반반 인간으로 그린다.
한 덩어리의 침묵이 나를 채웠다. 주드가 숨을 들이켜자 내가 따라 했다. 이제 이러고 놀 나이는 지났는지도 모르지만, 뭐 어때.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주드의 미소가 보였다. 우리는 함께 숨을 내쉬고, 함께 들이마셨다. 내쉬고, 들이마시고, 마시고 내쉬고, 내쉬고 마셨다. 어제 숲에서 있었던 일을 나무들이 다 잊어버릴 때까지, 엄마 아빠의 목소리가 굉음에서 음악으로 바뀔 때까지, 우리가 쌍둥이가 아니라 하나의 온전한 사람이 될 때까지.
MJ, 즉 비운의 주드(Misfortunate Jude)는 내 악명 높은 ‘불운’ 덕분에 전교생에게 불리게 된 이름이다. 작품이 가마에 들어가는 족족 깨져서만이 아니다. 작년 도자기 작업실에서는 내가 만든 그릇들이 밤중에 진열대에서 뛰어내렸다고 한다. 드나든 이는 아무도 없었고 창문은 꽁꽁 잠겨있었으며 지진이 발생한 가장 가까운 곳은 인도네시아였다. 야간 관리인은 영문을 몰랐다.
모두가 영문을 몰랐다. 나만 빼고.
케일럽 카트라이트가 양손을 들었다. 시그니처 룩인 검정 터틀넥, 검정 스키니진, 검정 아이라이너, 검정 중절모에 이어 본인의 개성을 드러내는 제스처였다. 나름대로 치명적인 예술가 병에 걸린 듯한 매력이 있지만, 딱히 눈이 간다는 건 아니다. 나의 ‘보이 보이콧’은 순조롭게 진행 중이다. 남자애들의 시야에서 걸러질 외관도 완벽히 갖췄다.
투명 인간이 되고 싶다면: 탱글탱글한 금발을 1미터쯤 잘라내고 남은 머리카락은 검정 비니 안에 쑤셔 넣는다. 타투는 아무도 볼 수 없게 꼭꼭 숨긴다. 오버사이즈 후드 집업, 오버사이즈 바지, 스니커즈만 착용한다. 되도록 입을 열지 않는다.
(가끔은 내가 지은 구절을 경전에 추가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