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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프랑스소설
· ISBN : 9788984374614
· 쪽수 : 488쪽
· 출판일 : 2023-06-01
책 소개
리뷰
책속에서
“아가씨는 누구냐니까?”
내가 거듭 묻자 여자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날 첫눈에 알아볼 거라 생각했는데…….”
어둠 때문에 얼굴이 또렷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귀에 익은 목소리는 아니었다. 더구나 지금은 스무고개 식으로 그녀가 누군지 알아맞히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성냥을 그어 패서디나의 벼룩시장에서 산 낡은 허리케인 램프에 불을 붙였다.
은은한 불빛이 실내에 퍼져나가면서 여성 침입자의 모습이 보다 명확하게 들어왔다. 나이가 스물다섯쯤 돼 보이는 젊은 여자로 왕방울처럼 큰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하고, 갈색 머리칼에서는 빗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우린 한 번도 만난 적 없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볼 거라 생각했죠?
그녀가 피식 헛웃음을 흘렸지만 나는 절대로 그런 수작에 말려들 생각이 없었다.
“아가씨, 이제 그만 하시죠. 이 야심한 새벽에 남의 집에서 대체 무슨 짓이죠?”
“정말 모르겠어요? 나란 말이에요, 빌리.”
캐롤과 단둘이 있을 때면 어린 시절 겪었던 혼돈스런 상황이 부메랑처럼 날아와 나를 할퀴고 지나갔다.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세상의 전부나 다름없었던 맥아더파크의 지저분한 공터들, 우리를 가두었던 그 악취 나는 수렁과 질식할 것 같았던 공기, 학교가 파한 후 철책으로 둘러쳐진 농구장에서 나누었던 고통스러운 대화의 기억들…….
오늘도 나는 우리가 아직 열두 살에 머물러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수백만 부가 팔린 내 소설들, 캐롤이 체포한 수많은 범죄자들은 우리 둘이 맡은 연기에 필요한 소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린 아직도 그 혼돈의 거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사실 우리 셋 다 아이를 낳지 않은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강박증과 싸우기에도 벅차 생명을 잉태해 흔적을 남기겠다는 희망 따위는 품어 볼 틈이 없었다. 솔직히 나는 캐롤의 근황에 대해 잘 몰랐다. 요즘은 얼굴을 볼 기회도 뜸했고, 더러 만날 기회가 생겨도 서로 본질적인 문제는 건드리지 않으려 애썼다. 어쩌면 우리가 입에 올리지만 않는다면 과거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 있을 거라 믿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사람이 산다는 건 그리 간단하고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을 잊기 위해 밀로는 허랑방탕하게 살고 있고, 나는 크리스털 메스를 흡입하고 있고, 온갖 중독성 약물로 하루하루 버티며 필사적으로 글쓰기에 매달려 있다.
“난 거창한 이야기는 하기 싫어.”
캐롤이 티스푼을 빙글 돌리며 말했다.
밀로가 없으니 굳이 유쾌함을 가장할 필요가 없다고 느껴서인지, 그녀의 어두운 얼굴에 수심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정말 대책 없는 여자네. 당신은 면허증도 없으면서 절도 차량을 몰았어요. 게다가 샌디에이고 카운티의 과속 단속 역사상 최고 기록으로 달린 게 확실해요.”
“알았어요. 그 도덕군자 같은 소리는 들을 만큼 들었으니 제발 그만해요. 이제야 당신 애인이 내뺀 이유를 알겠어요.”
나는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당신은 뭐라 규정할 말이 없는 여자야. 당신 혼자 이집트에 내린 10가지 재앙에 맞먹으니까.”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생각하는데 정신이 팔려 나는 그녀의 대답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보안관은 일단 본부에 지원을 요청할 테고, 우리를 순찰차에 태워 경찰서로 데리고 간 다음 도난당한 차를 찾았다고 차주인 밀로에게 연락할 것이다. 빌리가 신분증도 운전 면허증도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상황은 더욱 심각하게 꼬이게 될 것이다. 게다가 내가 가석방 상태인 유명 작가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해질 게 분명했다.
순찰차가 우리 차 몇 미터 뒤에서 멈춰 섰다. 빌리는 차의 시동을 끄고 나서 의자에 앉은 채 어린아이처럼 다리를 심하게 떨었다.
“바보처럼 굴지 말고 핸들에 손 얹고 차분하게 앉아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