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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개신교) 목회/신학 > 신학일반
· ISBN : 9788985467797
· 쪽수 : 344쪽
책 소개
목차
책을 내며
글을 시작하며
1부 구약성서와 종교 간 해석 방법론
1. 그리스도교 역사의 인식과 관점
2. 현대 세계의 상황 인식
3. 종교간 대화의 걸림돌 : ‘우상숭배 금지’의 극복
4. 역사비평 방법을 넘어
5. 종교들 안에서 종교의 해석
6. 성서 비평방법과 ‘영성적’ 해석
7. 지구적 제국의 상황에서 성서해석
2부 구약성서의 하느님 새로 보기
1. 우상숭배 금지의 족쇄 풀기
2. ‘야웨’와 ‘엘로힘’의 종교 간 대화 - 구약의 오경과 예언서를 중심으로
3. 야훼의 배우자이자 민중종교로서 ‘아세라’(Asherah) 여신(女神)
3부 구약성서와 종교 간 대화
1. 그리스도교의 정경(正經) 선언은 약이었는가, 독이었는가?
- 지배적 그리스도교와 민중 유대교의 비교
2. 창세기 1장의 생명과 생태사상 : 노장사상과 불교적 이해
3. 구약의 ‘고통’에 대한 불교적 해석
글을 맺으며
참고문헌
저자소개
책속에서
과거 로마제국 시대나, 유럽의 그리스도교 국가들이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남미 지역을 식민지로 만들던 시기에 수많은 희생자들을 냈던 것을 보면서, 여전히 예수님은 ‘내가 진리요!’ ‘나로만 구원’을 주장하실 건가? 예수님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선포하셨지만, 다른 진리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고 배척하고 박해한다면, 그 진리는 지배를 위한 이데올로기가 아닌가? 하느님과 예수님은 인간들이 저지르는 파국의 역사들을 보면서도 방관자로 계셨던 것에 대한 책임은 과연 하나도 없으실까? 단순히 지상에서 예수 자신만 알았으면 구원시켜주는 역할로 끝나는 것일까? 예수님을 잘 아는 자가 폭력과 전쟁을 일삼아도 구원의 대상일까? 역사 속에서 수많은 가해자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 받았다는 확신 때문에 마음 놓고 폭력과 전쟁을 더 저지른 것은 아니었을까? 하느님은 그리스도교, 유대교, 이슬람교가 자신의 뿌리에서 나왔고, 각각은 하느님 자신을 숭배하면서도, 서로들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리고, 싸우고 죽이는 모습들에 전혀 책임은 없으실까? 물론 하느님과 예수님은 기나긴 시간이 흘러가면서 인간들이 스스로 해결하는 것을 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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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정경(필자는 정경을 어원적으로 해석하는 ‘기준,’ ‘막대’라고 획일적으로 정의내리는 것에 못마땅하다. 정경 선언은 솔직하게 말하면, ‘종결’내지는 ‘차단’인 것이다)이라는 교회권위에 의존하여 모든 외부와 단절하였고, 교회권력과 세속권력에 의존하거나 누리면서 초기부터 버티어 왔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기독교는 정경을 선포한 때부터 사상적으로 성장이 멈추었기에 척박한 토양으로 바뀌었다고 본다. 새로운 사상들이 흘러들어올 여지를 차단하였기에 사막화가 처음부터 일어났다고 본다. 그래서 믿을 것은 권력과 교리였다고 본다. 그것이 인류 역사에 얼마나 큰 재앙들을 가져왔는가? 이런 점에서 필자는 계속되는 정경화를 이루지 못하고, 정경으로 차단시킨 것은 독(毒)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싶다.
기독교가 성서를 정경으로 선포한 이후에 결과적으로 종교 간 갈등, 폭력, 종교재판, 전쟁의 신앙적 이념 제공 등의 부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인류사에 많은 흠집과 상처를 내었다. 곧 창의 종교가 되었던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 있는 오늘 한국의 보수적인 신학과 교회들에서 부정적인 현상들이 표출되고 있다. 여기서 독을 빼고, 해독(解毒)하는 길은 이웃종교들, 전통 사상들과 마음껏 대화를 나누는 것이며, 이성을 존중하여 인문학, 과학 등과 활발한 교류를 만들어 내는 길이다. 또한 사회의 약자들을 위한 민중 선교를 통해 사회적인 신뢰를 회복하는 길이라고 본다. 사막화를 극복하는 것은 나무를 심는 일이며, 물과 양분을 제공받는 길이다. 물론 비가 자주 내리는 것이 근본 해결책이다. 기독교의 성서는 정경으로서 과거의 종결이 아닌, 오늘 현실에서 정경화(canonization) 과정으로 새롭게 재구성(reconstruction)해야 할 것이다. 곧 유대교 경전들의 형성과 해석의 방식에서 배울 점이 있다고 본다. 가령 신학교육 현장이나 교회현장에서 신앙 훈련의 일환으로 성서를 그대로 옮겨 베끼는 방식이 아니라, 성서도 각색해보고, 오늘의 상황과 맞지 않는 부분들은 각색도, 첨가도, 삭제도 해보고, 교리에 비추어도 맞지 않는 의견과 해석들이 나온다고 해도 존중해 줄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한다면 신앙을 성숙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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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도 당시 사회의 화석처럼 굳어진 폐습들과 구약 본문들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겼다. 그리고 현실 종교권력들과 세속권력을 비판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곧 예수의 삶이 구약시대의 옛 문헌을 ‘종결’로 본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경화’를 이루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들을 종합해 볼 때, 한국의 신학과 교회는 신명기적 사고의 배타성과 정경이 선언한 종결(closure)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과감하게 털고, 개방(openness)을 통해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토양으로 바꾸어 가야 할 것이다. 한국의 신학과 교회는 몸집이 세계를 향할 만큼 커졌으나, 여전히 구태의연한 경직되고 속 좁은 사상과 신앙에 안주하고 있다. 다양하고, 개방적인 논의를 펼치면서, 넓은 차원에서 신학과 교회의 새로운 틀과 정체성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21세기와 2천년을 여는 때에 철학적, 종교적, 사상적, 영적인 상호교류를 통해 근본적인 새 틀 짜기로 새로운 그리스도교 신학과 교회를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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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는 매우 급격히 성장하면서 교회권력 역시 정점을 향해 올라가고 있다. 하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 보면, 속빈 강정이랄까? 신자들을 들뜨게 해서 박수치고 코미디 쇼 보듯이 신앙을 체험하게 하고 있다. 자기를 들여다보는 내면의 훈련과 이 사회와 역사와 세계를 변화시키는 통찰과 참여가 결여되어 있다. 예수만 믿으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엇이든지 다 해결이 될 것인 양 착한 신자들을 착각하게 하고 어지럽게 만들고 집단 최면을 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