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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문학의 이해 > 한국문학론 > 한국시론
· ISBN : 9788990944801
· 쪽수 : 112쪽
· 출판일 : 2023-02-16
책 소개
목차
서문
이상개 운무雲霧 속에 던져지다
허만하 깊이의 순수
박정애 나목
박옥위 단추와 집
유병근 소낙눈
강영환 띠풀꽃 잠든 곳에
서규정 분홍역에서
조향미 귀향
조성래 인플루엔자
손 음 벚꽃 십 리
김태수 송카우 계곡의 저녁 노을
김경수 틈의 미학
김종미 에스프레소
김길녀 시간의 죽음
안 민 어제 ―하나의 절망이 가고 하나의 절망이 흘러오던
정진경 디지털 호모나랜스
안효희 마른 꽃
동길산 편법
최원준 北邙
이민아 층층나무의 편지
김점미 반성
권애숙 반그늘
김미령 플래시몹
황길엽 가벼워지기
김 언 언제 한번 보자
송 진 테라스 파크
최영철 오늘은 버릴 것이 없었습니다
이윤길 파도 2
최휘웅 낱말
서화성 한 시간
김요아킴 나비, 날개를 탐하다
이기록 Ghetto
전다형 동해남부선
김형로 꽃잠
채수옥 레고
박이훈 낙조, 그 이후
신정민 5구역
권정일 너무는 너무하지 않는다
정안나 양귀비 피는 방
김수우 틈
성수자 손바닥
전성호 핵발전소가 보이는 기우듬한 저녁
김혜영 나무와 하얀 뱀이 있는 숲
최승아 광대들
이정모 바람에 다 털리고
배영옥 훗날의 시집
정선우 지심도 동백
고명자 마른 풀에 베인 뺨의 노래
박춘석 무정부의 나날 ―존재론을 떠나며
원양희 눈물의 나라는 참으로 신비로웠다
후기
저자소개
책속에서
운무雲霧 속에 던져지다(이상개)
바다로 간다는 게 산으로 갔다
사흘을 벼르고 고른 끝에 골라잡았지만
끝장을 보는 데는
삼 년이 아니라 삼십 년도 더 걸렸다
새벽부터 운무는
종말을 불러다 구색을 갖추느라 바빴지만
이제는 운무 속에 나를 던질 때가 되었다
나는 미끼 없는 곧은 낚시 즐겼으니
간 큰 놈은 오너라 와서 날 물고 가라
산과 산 사이 바위와 바위 사이
초록은 동색이라고
우울과 권태가 보약 같은 밑밥이 될 줄이야
먼 창공으로 흐르는 시간 속에
내 영혼 푸르게 푸르게 산과 바다에 업힌다
―이상개 시집 산 너머 산(빛남) 중에서
■
모든 시인의 문학적 출발은 상처의 재현에서 시작된다. 시 작업과 문학활동에 평생을 바친 노시인의 최근작을 읽으면서 모든 문학의 결론은 화해와 소통임을 또 깨닫는다. 시인의 길을 걸으면서 부딪히고 깨지면서 고통 받았던 일들이 수없이 많았겠지만 반복되는 상처의 재현 속에 세월은 흐르고, 14권의 시집만으로도 풍요로운 시인의 영혼은 이제 가는 길이 산이든 바다이든 개의치 않는다. 시인의 방식으로 살아온 안개 속의 삶이, 타자뿐만 아니라 자연마저도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도록 무르익었음을 깨달으며 이 시집 서문에 밝힌 시인의 일갈이 경외롭다. “살만큼 살면 되겠지만/ 얼마나/ 사람답게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깊이의 순수(허만하)
돌 안에 고여 있는 시간이 광물질에 동화하여 침묵하고 있을 때, 고뇌 안에 쌓여 있는 슬픔은 비티아즈 해연 깊이가 된다. 빛이 뚫지 못하는 투명한 물의 두께가 만드는 어둠의 깊이에서, 생명은 스스로 형광을 만들며, 암흑에 저항한다. 에베레스트 산정에서 공기의 희박을 느끼고 쓰러진 인간이 높이를 깨닫듯, 조여 드는 어둠의 농도로 최후의 숨가쁨을 느끼는 물의 깊이. 밤하늘 시름 하나, 별똥별 무게로 바다 밑 바닥에 가라앉는 깊이. 슬픔과 고뇌를 초월한 명석한 깊이의 순수.
―허만하 시집 언어 이전의 별빛(솔) 중에서
■
삶의 생태학적 의미와 분석에 길들여진 시인들이 시 작업의 의미 없음에 불현듯 빠져들 때, 그 때 허만하 시인의 시를 읽어야 한다. 언어 이전의 존재, 생명 이전의 존재들에게 언어로 다가서는 시인의 고독한 정신작업을 읽고 나면, 수직으로 떨어지는 시인의 자의식에 전율을 느끼게 된다. ‘모든 존재는 시간 속에서 가능해진다.’라는 하이데거의 명제마저도 은유의 일부로 전락되는 시인의 절대적 존재를 향한 외침은 때론 시간 이전으로 때론 공간 이전으로 향하고 있으며, 니체의 극복되어야 할 인간으로서의 초인정신을 떠올릴 만큼 강렬한 시 정신은, 시 작업이 정신의 변방에서 얼마나 힘들게 일어나는 작업인가를 깨닫게 해준다.
30년간의 병리의학자로서의 삶을 마치고, 1999년에 펴낸 시인의 30년만의 두 번째 시집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이후 봇물 터지듯 발간되는 그의 정신작업들은 한국 시단의 평자들에게 두려움과 황홀감을 선사하고 있다. 1974년 부산시인협회가 창설되는데 일조하며 초대회장을 지내기도 한 시인의 다음 시구를 부산의 시인들에게 전하고 싶다. “사람은 풍경을 공유할 수 있지만 심연은 나누어 가질 수 없다.”
나목(박정애)
천수천안 관음의 손이라도 모자랄
일로써 일을 만드는 손
생명을 어루만지는 아름다운 손
이고지고 양손에 들고도 다 못 가져갈
이승의 짐, 고스란히 내려놓고
빈손이 할 수 있는 게 악수뿐이겠습니까
마주쳐 박수치면 모두가 기뻐하는
격려와 찬사뿐이겠습니까
용서와 화해 못 녹일 게 없는 용광로
수십 번 벼리어 단련된 맑디맑은
쇳소리로 허공을 가르는
바람의 칼이 고요를 그어 피 나지 않고
각자 제 나름의 길로 가는 우리
내 빈 손이 아니면 그대
빈손의 따스함을 어찌 느끼겠습니까.
―박정애 시집 가장 짧은 말(신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