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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서양사 > 서양근현대사
· ISBN : 9788991221505
· 쪽수 : 687쪽
· 출판일 : 2009-05-28
책 소개
목차
들어가는 글
1장 정상을 향하여_바빌론에서 베르사유까지
2장 뮌헨 1938_체임벌린과 히틀러
3장 얄타 1945_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4장 빈 1961년_케네디와 흐루쇼츠
5장 모스크바 1972년_브레즈네프와 닉슨
6장 캠프 데이비드 1978_베긴, 카터, 사다트
7장 제네바 1985년_고르바초프와 레이건
8장 생활방식으로서의 정상회담_G7부터 부시와 블레어까지
감사의 글
옮긴이 후기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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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외교의 성과는 열심히 토론하는 사람에게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스탈린은 분명 협상하기 까다로운 사람이었으나 예측하기 어렵고 감정을 앞세우는 히틀러와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까다로웠다. 얄타 회담 1개월 전 이든은 정상회담에 대해 우려를 표시했다. “세 사람 중 스탈린만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명확하게 알고 있고 또 대단히 터프한 협상가다. 총리는 이런 문제에서 너무 감정이 앞서고 대통령은 애매모호하면서 다른 지도자들에 대한 질투심이 많다.” 1965년에 얄타 회담을 회고하면서도 이든은 의견을 바꾸지 않았다. “처칠은 말하기를 좋아했고,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았으며, 자기의 발언 차례를 잘 기다리지 못했고 차례가 돌아오면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외교 게임에서의 성과는 반드시 열심히 토론하는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이든은 스탈린에 대해서는 이렇게 논평했다. “나는 이런저런 국제회의를 30년 가까이 체험해보았다. 만약 회담장에 들어갈 팀을 고르라고 한다면, 스탈린을 첫 번째로 선택하겠다.”-p.197 중에서
세부 사항까지 꼼꼼히 관리하여 합의를 이끌어낸 카터 대통령
세 지도자는 모두가 정상회담에서의 합의에 크게 기여했다. 사다트의 극적인 예루살렘 방문은 초강대국 관계로부터 평화 과정을 분리시켰고 카터를 격려하여 나름대로 중동 문제에 나서게 했다. 그것은 또한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평화에 대한 심리적 장벽을 깼다. 하지만 베긴은 물론이고 사다트 또한 개념을 현실로 바꾸어놓을 수 없었다. 현실로 바꾸어놓는 것은 카터의 몫이었다. 그는 신중하게 계획된 정상회담에 두 사람을 초대하고 초기의 교착 상태 이후 협상 과정을 세부 사항까지 꼼꼼히 관리함으로써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 어떤 대통령도 중동에 이런 개인적 관심사를 보이지 않았고 혹은 정치적 협상에 그렇게 많은 에너지, 생각, 정치적 역량을 투입하지 않았다. -p.470~471 중에서
정상회담, 앞으로 어떻게 변모할까
21세기의 정상회담은 여론에 극적인 영향을 주지 못하게 되었다. 1961년의 빈 회담이나 1978년의 캠프 데이비드 회담은 대중매체가 그 뉴스를 온 가정에 전달했다.…… 이를테면 1978년, 카터의 홍보 담당 비서관 조디 파월은 미국의 3대 텔레비전 방송사, 통신사, 몇몇 주요 신문사에 뉴스를 건네주면, 캠프 데이비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 세계적으로 인지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와 매체는 매스미디어가 아니라 개별화되어 있다. 케이블 방송과 인공위성 방송 채널이 전국 텔레비전 방송망을 압도했고, 보통 사람들은 언제, 어디에서, 어떤 것이든 정상회담은 물론이고 그 밖의 정치 행사 뉴스를 광범위하게 선택할 수 있다. 인터넷, 웹페이지, 블로그 또한 엄청나게 많은 독자적 정보, 루머, 논평을 제공하고 있다. 그리하여 정부는 정상회담을 정부 편리할 대로 해설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소수의 텔레비전 방송사와 신문사만이 뉴스를 전하던 시절의 방식으로는 사람들의 관심을 정상회담에 집중시킬 수 없게 되었다. -p.556~557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