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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철학 일반 > 교양 철학
· ISBN : 9788992114813
· 쪽수 : 362쪽
· 출판일 : 2012-09-11
책 소개
목차
서문
제1장 인간 존엄성이라는 관념
개인과 인류의 존엄성 | 도덕적 가치가 아닌 실존주의적 가치 | 유일성과 존엄성 | 개인의 지위에 대한 공격 | 인권이론에서의 도덕적 요소와 실존적 요소 | 세속적인 관점에서 본 인류의 존엄성
제2장 개인의 지위와 인권
권리는 절대적이다 | 인권 옹호의 도덕적 요소 | 실존적 요소의 필요성 | 실존적 요소와 도덕적 요소의 충돌 | 도덕성, 상대주의 그리고 회의주의 | 개인의 도덕성과 공공의 도덕성의 차이 | 최고의 개인적 도덕성은 황금률이다 | 최상의 공공 도덕은 권리에 대한 정의다 | 권리 옹호의 이론적 문제점 1: 자기중심주의 | 권리 옹호의 이론적 문제점 2: 공리주의의 권리에 대한 비판 | 권리 옹호의 이론적 문제점 3: 덕 윤리(virtue ethics) | 온정주의의 유혹 | 인권에 관한 다른 도덕적 질문들
제3장 인간의 유일성: 특징과 속성
자연에 봉사하는 인류 | 철학에 대한 반론 | 인류의 위상과 위대한 업적 | 인간의 고유한 속성과 특질 | 언어는 인간의 유일성에 있어서 핵심이다 | 언어와 사고(思考) | 사고와 지식: 관점주의 | 사고와 지식: 조물주의 지식 | 지식, 자의식 그리고 행위자 | 자유 행위자와 창조적인 예측불가성 | 요약
제4장 인류의 위상과 위대한 업적들
인류의 위상과 불평등 | 자연과 인류에 대한 찬미 | 민주주의와 인류의 위상: 위업들 | 민주주의와 인류의 위상: 정신세계 | 민주주의, 새로운 매체 그리고 자연의 청지기 | 죽음 앞에서의 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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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윌리엄 브레넌William Brennan 대법관은 사형 제도를 일시적으로 무효화한 판결(퍼먼 vs. 조지아 주Furman vs. Georgia, 1972)에 동의함으로써 도덕적 가치와 실존적 가치를 개념적으로 구분했다. 여기서 그의 논점은 국가가 개인의 권리를 인정하거나 존중하지 않고 한 인간의 존재 자체에 가하는 여러 가지 고통보다는 사형제도가 주는 특정한 고통(정신적?육체적)에 있었다. 그는 여기서 하나의 일반원칙에 다다르게 된다. 그는 극단적으로 심각한 처벌, 특히 사형제도는 고통 이상의 것을 수반한다고 말한다. “극형의 문제점은 존엄성을 가진 인간의 목숨을 못 쓰는 장난감을 폐기하듯 처리하는 그들의 비인간적인 처사에 있다.” 그리고 이것은 “죄를 지은 사람은 같은 인간으로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는 또한 같은 범죄를 저질러도 어떤 이들은 사형선고를 받지 않고 어떤 이들은 사형을 선고받을 때, 사형수의 심각한 고통을 당대 사회의 분위기가 용인하지 못할 때, 그리고 사형선고보다는 가벼운 처벌로도 범죄를 억제할 수 있을 때 사형제도와 같은 극형은 의미를 잃게 된다고 말한다. 육체적인 고통보다 정신적인 고통을 안겨주는 사형제도와 같은 고통스러운 처벌은 인간 존엄성에 대한 전형적인 침해이다. 그래서 브레넌은 사형은 유난히 잔인하고 비정상적인 처벌이며, 따라서 미국 연방 수정헌법 제8조 규정에 어긋난다고 판결했다.
미국의 헌법 어딘가에 인간 존엄성이라는 관념이 인권의 옹호에 있어서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하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퍼먼소송의 핵심은 사형수가 겪는 심한 고통, 즉 오랜 기간 사형집행을 대기해야 하고 집행 시 당할 수밖에 없는 정신적 고통이었다. 브레넌이 사형제도에 반대한 이유는 인간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 버리는 대상으로 본다든지, 국가가 죄수를 한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고 있는가의 여부를 떠나서 그토록 극심한 고통을 주는 것은 비도덕적이며, 국가가 저지르는 중대한 반인륜적 행위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형제도가 국가를 살인자와 다를 바 없게 만든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표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또한 인간 존엄성이라는 관념을 확대하여 국가가 개인의 자기개발을 지원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인간 존엄성에 대해 지나치게 보호적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는 사형제도나 다른 잔인한 처벌을 원칙적으로 혐오하는 가운데 인간 존엄성을 개념화했다.
공리성의 논리를 예로 들어 보면, 홀로코스트Holocaust가 없었다면 지금의 이스라엘도 존재할 수 없다. 고로 홀로코스트가 있었던 것이 다행스러운 일인가? 아무도 그렇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감히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느끼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가치 있는 것들의 상실로 인한 엄청난 희생에 대한 느낌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만일 잔혹한 행위가 약간의 고통으로 인해 더 큰 기쁨을 만들어내는 필요한 전제조건이라면, 공리주의 사상가들은 고문, 혹은 고문과 비슷한 행위를 수용할 자세가 되어 있는가? 또 다른 예로, 다수가 누리는 문화와 번영을 더욱 번창시키기 위해서 노예제도를 수용할 수 있는가? 평화로운 시기보다 더욱 빠른 사회적 진보를 위해 전쟁을 원할 수 있는가? 쾌락과 고통을 도덕적으로 비교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소수가 견뎌야 하는 큰 고통이 다수의 더 큰 쾌락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전례가 없는 더 위대한 선(善)을 만들어내기 위해 생각할 수도 없는 잘못된 일을 감행하는 것이 정당화 될 수 있다는 뜻이 될 것이다.
도덕적인 사고에서는 고통이 최우선시 되어야 한다. 물론 우리가 관심을 갖는 고통이나 쾌락에 관련한 문제가 아닌 다른 이유로도 충분히 인권을 옹호할 수 있지만, 그러한 관심은 고통과 쾌락이 도덕적으로 비교가 가능하다는 가정을 반박해야 한다. 쾌락과 고통이 연속선상에 있다는 생각은 소수보다는 다수를, 혹은 다수보다는 특정 소수에 대한 배려로서 다른 집단의 이익을 위해 어떤 사람을 이용하려는 의지를 강화시킨다. 공리는 다수에만 호의를 보인다. 하지만 인권이론은 모든 개인의 권리를 절대적인 것으로 인정하고 침해받지 않도록 보존해야 한다는 맥락에서 그러한 계산을 허용치 않는다. 바로 이것이 정의가 요구하는 것이며, 모든 개인이 누려야 하는 권리이다.
인류는 자연에 봉사하는 데 있어 자연과의 결별, 즉 어느 정도의 비자연성을 내세운다. 인류는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자연에 보답하고, 훼손시킨 자연에 대해서 보상하려고 한다. 확실히 인간의 유일한 속성과 특질은 인류에게도 보탬이 된다. 따라서 그것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을 위해 봉사할 수 있게 해준다. 여기서 아이러니는 인간이 독특한 비자연적인 속성과 특질들을 통해서만 자연을 섬길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인류가 자연의 역사를 기록하며, 이해하고 감사할 줄 알며, 그들에게 찬사를 보내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는 같은 속성이나 특질을 통해 자연에 대한 봉사와는 별도로 스스로의 비자연적 위상을 과시해 왔다.
인류의 유일성에 대한 의문은 지구상에 인간이 없거나 그 인구가 현저하게 줄면, 세상은 더욱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이라는 주장에 의해서 제기된다. 인류를 달갑게 여기지 않고, 스스로가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인간보다는 다른 모든 종들이 우수하다고 가르치는 사상가들 사이에 인간에 대한 집단학살적인 성향이 있다. 이 같은 생각은 존 그레이가 이미 <지푸라기 개Straw Dogs>(2002)라는 책을 통해 재치 있게 설명했다. 이러한 생각을 갖는 주된 이유는 인류가 이미 자연의 일부분을 파괴했고 계속해서 위협을 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류의 파괴 능력은 다른 모든 종들의 능력들을 합한 것을 넘어선다. 그러므로 나는 인류가 지금 당장 해야 할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봉사는 자연보호에 관심을 가지고 멸종의 위기에 처한 동물들과 식물들을 구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연이 인류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선입견부터 버려야 한다. 이론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자연을 보존하는 유일한 방법은 인류가 멸종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인구가 현저하게 늘어나는 것을 막고 새로운 형태의 질서를 유지하고 실천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