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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사 일반
· ISBN : 9788992920193
· 쪽수 : 488쪽
· 출판일 : 2008-08-15
책 소개
목차
제 1부 고대
001 위만의 쿠데타(BC 194년) ― 최초의 쿠데타: 신화의 시대는 끝나고
002 고구려 불교 승인(372년) ― ‘불국토’로 가는 길
003 고구려의 중원 정벌(395년) ― 대륙을 달리다
004 평양 천도(427년) ― 한반도와 만주 동시 경영의 계기
한국사 깊이 읽기_수도를 바꾼다, 시대를 바꾼다-천도
005 웅진 천도(475년) ― 백제의 멸망을 막은 결단
006 진흥왕의 성왕 배신과 한강 유역 진출(553년) ― 진흥왕이 북한산에서 본 것은…
007 선덕여왕 즉위(632년) ― 모란꽃 그림에는 피의 향기가…
008 연개소문의 쿠데타(642년) ― 고구려의 혼을 살린다?
009 나당동맹(648년) ― 한반도의 운명을 가른 역사적 결정
010 소정방의 신라군사 처벌에 반발한 김유신(660년) ― 나당전쟁의 실마리
011 원효의 당 유학 포기(661년) ― 해골 물에서 얻은 것은
012 남건의 남생에 대한 반란(666년) ― 고구려의 멸망을 불러온 형제 간 싸움
013 경덕왕의 중국화 정책(757년) ― 동방예의지국으로의 첫걸음
014 장보고 암살(846년) ― 스러진 해상왕의 꿈
제 2부 고려시대
015 왕건의 궁예 축출과 고려 건국(918년) ― 준비된 쿠데타: 승자가 쓴 역사
016 왕건의 대신라 햇볕정책(918년) ― 평화적 통일을 위한 결단
017 신검의 쿠데타(935년) ― 후백제의 멸망을 부른 아들의 반역
018 노비안검법 실시(956년) ― 최초의 민권 개혁?
019 과거제 도입(958년) ― 900년간 이어온 ‘인재 등용의 혁명’
020 시무28조 채택(982년) ― 유교국가로의 길
021 서희의 강동 6주 획득(993년) ― 한국사 최고의 협상
022 서경 천도 무산과 묘청의 난(1135년) ― 서경에 심은 황제의 꿈
023 무신의 난(1170년) ― 피가 피를 부르는 폭압의 시대
024 고려 고종의 강화도 천도(1232년) ― 국난 극복을 위해? 정권 연장을 위해!
025 팔만대장경 조판(1237년) ― 한국사의 불가사의
026 원종의 쿠빌라이칸 접견(1260년) ― 강화도에서 나와 팍스 몽골리카로
027 삼별초항쟁(1270년) ― 최초의 민중운동?
028 일연의 삼국유사(1285년경) ― 또 하나의 역사
029 안향의 성리학 수입(1288년) ― 거대한 뿌리 심겨지다
030 이제현의 입성책동 반대운동(1323년) ― 홀로 나라를 지키다
031 공민왕의 반원정책(1352년) ― 익숙한 것에서의 결별
032 문익점의 목화 수입(1363년) ― 널리 세상을 따뜻하게 하다
033 공민왕 시해(1374년) ― 고려 부흥의 꿈은 저물고
034 정도전과 이성계의 만남(1383년) ― 개인과 개인의 만남? 문과 무의 동맹!
035 위화도 회군(1388년) ―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한국사 깊이 읽기_한국사의 정치폭력
036 개혁세력의 토지개혁 추진(1390년) ― 회귀형 개혁
제 3부 조선시대
037 한양 천도(1394년) ― 한강으로 물갈이 가자
038 이방원의 1차 왕자의 난(1398년) ― 이방원 vs 정도전
039 조선왕조실록 편찬 결정(1409년) ― 실록 편찬 결정을 둘러싼 갈등
040 양녕 아닌 세종에 왕위 계승(1418년) ― 조선은 어떤 국가여야 하는가?
041 대마도 정벌(1419년) ― 왜구의 본거지를 쳐라
042 세종의 공법 개혁 및 후퇴(1430년) ― 국민투표로도 부족했던 개혁 기반
043 4군 6진 개척(1433년) ― 한반도 강역의 완성
044 세종의 갑인자 주조(1434년) ― 위대한 금속활자, 그러나…
045 세종의 숙신옹주 친영 결정(1435년) ― ‘시집살이’의 기원
046 한글 창제(1443년) ― 글 또한 만 백성이 공유할 권리가 있다
한국사 깊이 읽기_창조와 발명
047 계유정난(1453년) ― 수양대군 vs 김종서
048 조광조의 소격서 혁파(1518년) ― 무엇이 미신인가?
049 조광조 일파 제거(1519년) ― 젊은이들의 좌절
050 이순신, 전라좌수사로 임명되다(1591년) ― 임진왜란을 막아낸 인사행정
051 신립의 탄금대 선택(1592년) ― 피할 수 있었던 패배
052 고경명의 금산 선택(1592년) ― 한양으로? 고향으로?
053 여진족의 원군 제의를 조선정부가 거절(1592년) ― 병자호란의 불씨를 남기다
054 동의보감 편찬 결정(1596년) ― 독자적 의학체계를 구축하다
055 쇄환사 파견(1607년) ― 다시 내민 화해의 손
056 광해군의 대동법 실시(1608년) ― 200년이 걸린 개혁
057 이수광의 서양문물 소개(1614년) ― 매우 귀중한 ‘주워들은 이야기’
058 광해군, 후금에 국서 전달하다(1622년) ― 고독한 결단은 배신을 부르고
059 인조반정(1623년) ― 조선은 오랑캐 나라가 아니다?
한국사 깊이 읽기_명분이냐? 실리냐?
060 안용복의 독도 수호(1696년) ― 홀로 국토를 지키다
061 이승훈의 천주교회 창설(1784년) ― 취사선택의 실패
062 신해통공(1791년) ― 왕의 필요와 백성의 필요
063 정조, 사망 직전 김조순에게 앞날을 부탁하다(1800년) ― 세도정치의 문을 열다
064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제작(1861년) ― 한평생 걸려 정리한 한반도의 모든 것
제 4부 근.현대
065 경복궁 중건(1865년) ― 경복궁에 비친 낙조
066 대원군의 쇄국정책(1866년) ― 과거에 매달렸던 실용주의
067 강화도조약(1876년) ― 역시 믿을 수 없는 회담
068 갑신정변(1884년) ― 개혁의 쿠데타: 가장 짧은 쿠데타
069 동학농민운동(1894년) ― 자주를 외친 대중의 첫 목소리
070 신분제 철폐(1894년) ― 수천 년 동안의 사슬
한국사 깊이 읽기_세상의 절반, 여성에 관한 한국사의 결정들
071 한글의 공식문자화(1894년) ― 450년 만의 햇볕
072 명성황후 시해(1895년) ― 누가 이 여인을 죽였는가?
073 독립협회와 독립신문(1896년) ― 개화와 친일 사이
074 메가타의 화폐 정리 사업(1904년) ― 103년 전의 IMF
075 이토 히로부미 암살(1909년) ― 하얼빈의 총성
076 33인의 독립 선언(1919년) ― 3.1 운동의 불씨를 만든 명망가들의 선언
077 임정 수립(1919년) ― ‘임시’로 만든 ‘조국’
078 한반도 분할 점령(1945년) ― 전쟁의 불씨
079 반탁운동 결정(1945년) ― 엘리트의 기만
080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1948년) ― 찢겨진 산하
081 농지 개혁(1949년) ― 미흡한 새 세상
082 김구 암살(1949년) ― 거인의 죽음
083 반민특위 습격(1949년) ― 원죄의 씨를 뿌리다
084 한국전쟁(1950년) ― 한반도 냉전 심화의 결정적 계기
085 북한군의 3일 서울 지체(1950년) ― 전장의 안개에 싸여?
086 유엔의 한국전 개입 결정(1950년) ― 소련 안보리 불참의 의문
087 맥아더 해임(1951년) ― 맥아더, 누구를 위하여 전쟁하려 했나?
088 한미동맹(1953년) ― 이승만의 벼랑 끝 전술
089 4.19 교수 데모(1960년) ― 민중 승리의 결정적 계기가 되다
090 5.16(1961년) ― 후퇴란 없다?
091 베트남 파병(1964년) ― 동맹의 덫, 혹은 복음
092 한일회담(1965년) ― 한일관계, 숙제는 이어지고
093 경부고속도로 착공(1968년) ― 압축적 경제 발전을 가능하게 한 결정
094 한글 전용(1968년) ― 한글 vs 한자
095 10월 유신(1972년) ― 가지 않았어야 할 길
096 박정희 암살(1979년) ― 장기 독재시대, 20년 만에 막을 내리다
097 12.12(1979년) ― 악(惡)의 반복
098 광주민주화운동(1980년) ― 민주화운동의 위대한 기념비
099 올림픽 유치 성공(1981년) ― 벽을 넘어 한국을 세계에 알리다
100 이병철 반도체 생산 결정(1982년) ― 반도체 강국으로의 도약
101 6.10 수용한 6.29(1987년) ― 한국의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게 된 절반의 승리
102 후보 단일화 실패(1987년) ― 복마전을 열다
103 카터 방북(1994년) ― 현대 한국사 최고의 결정
104 IMF 구제금융 신청(1997년) ― 세계화의 덫
105 남북정상회담(2000년) ― 적대적 남북관계, 화해와 협력관계로 전환되다
한국사 깊이 읽기_만남의 순간들
106 노무현 탄핵(2004년) ― 쿠데타인가? 정의 실현인가?
107 수도 이전 무산(2004년) ― 관습 헌법의 벽
108 부계성 강제조항 폐지(2005년) ― 동방예의지국은 없다
한국사 깊이 읽기_가장 많은 한국사 중요 결정을 내린 사람은?
부록 한국사 40대 주요 결정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동방예의지국은 없다 「부계성 강제조항 폐지」476~480쪽
2005년 12월 22일,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는 재판관 7대 1의 의견으로 민법 제781조 제1항 본문 중 ‘자는 부의 성과 본을 따르고’ 부분이 헌법에 합치되지 않는다고 선고했다. 단 당장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2007년 12월 31일까지는 그 조항의 잠정 적용을 명한다고 덧붙였다.
이미 여러 차례의 민법 개정을 통해 가부장제적 속성을 하나씩 잃고(가령 1980년대까지는 상속에 있어 호주 및 아들에게 차등적 혜택이 있었다), 명맥만 남은 채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조차 없어지게 된다. 관습상 앞으로도 당분간은 부계성 위주로 계승되겠지만, 결국 혈통의 상징으로서의 성씨는 무의미해지리라. 그때쯤이면 본관이 어디니, ‘○○공파’라느니 하는 이야기도, 족보나 종친회 같은 것도 상투나 갓처럼 지난 시대의 유물이 되리라. 그것이 과연 인간을 더 행복하게 해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제 한국인들은 실질적 이익이 걸린 불평등만이 아니라, 상징적인 불평등조차 참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조선왕조 5백년 간 우리의 ‘민족성’에 뿌리내린 두 가지 특성 중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계기로 소멸에 접어들었다면, 이제 ‘동방예의지국’ 역시 그 길을 걷고 있다는 것뿐.
후퇴란 없다? 「5.16쿠데타」388~392쪽
“배수의 진을 친 우리들에게는 이제 후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 앞에는 오직 전진이 있을 따름입니다.”
사실 이 쿠데타는 얼마든지 예방하고, 진압할 수 있었다.
… 이런 일련의 어이없는 실수, 안이함, 어긋남 덕분에 5.16은 가능했고, 이 땅에는 고려 무신정권 이래 7백년 만에 군사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절대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한 경제개발과 근대화정책으로 후진국에서 탈피하는 계기를 마련했다.”(장두홍)
“군사정부가 집권함으로써 우리나라 민주화 발전과정에 역행하였다.”(이상협)
“경제개발의 반대급부로 민주주의 발전이 방해되고, 빈부격차와 재벌의 문어발 확장 등 사회 갈등이 증폭되었다.”(홍진호)
박정희가 한 말처럼, 대한민국은 스스로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군사정권을 추인하면서 배수의 진을 친 셈이었다. 이제는 다소 민주적 절차와 인권 탄압을 각오하고라도 경제발전과 근대화에 매진하면 안 된다, 그것이 은연중 국민이 품고 있던 의식 또는 무의식이었다. 그러나 중단 없는 전진은 없다. 모든 것은 멈추어야 할 때가 있고, 바꾸어야 할 때가 있다. 그렇지 않고 종전의 길에 집착하다가는 큰 환멸과 고통 끝에 철저하게 파멸하고 만다. 박정희는 자신이 남긴 말이 한시적으로만 의미가 있으며, 대한민국이 자신을 용인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더 일찍 깨달았어야 했다.
현대 한국사 최고의 결정 「카터 방북」448~451쪽
1994년 6월 13일,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전격 탈퇴했다. 그리고 한반도는 곧바로 전운에 휩싸였다.
미국은 발빠르게 대응했다. … 동해로 항공모함을 이동시키고 북한을 공격할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추도록 했다.
사태의 급박함을 알자 남한정부도 바빠졌다. 김영삼 대통령은 클린턴에게 전화를 걸어 “전쟁만은 안 된다”고 강력히 항의했다. 그러나 미국은 요지부동이었다. … 미국은 이미 2월에 주한미군과 국군의 전시 작전계획인 ‘OPLAN 5027’를 발표하였다. 5단계로 이루어진 이 계획은 북한의 주요 전력을 폭격한 다음 대규모 상륙작전을 실시하고, 북한 지역을 점령하고 군정을 시행한다는 내용이었다. 미국은 이제 그 시나리오대로 전쟁을 진행할 참이었고 … 6.25 당시의 처절한 동족상잔이 재연될 판이었다. 정녕 희망은 없는가?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카터는 청와대와 백악관의, 그리고 아마도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희망을 안고 평양으로 날아갔다.
1994년 6월 15일부터 18일까지 두 차례에 걸친 김일성과의 회담에서, 카터는 북핵문제 해소에 극적으로 성공하였다. 물론 그것은 카터 한 사람의 수완으로만 이룬 일은 아니다.
이렇게 제2의 한국전쟁은 회피될 수 있었다. … 하지만 다른 시각도 있다. 가령 권재상의 경우 “미국과 북한 모두 겉으로는 전쟁도 불사한다는 식의 태도를 보였으나, … 실제로는 타협을 모색하고 있었다”라고 본다.
아무튼 휴전 이후 한반도에 닥친 최대의 위기가 이로써 진정되었음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