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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영미소설
· ISBN : 9788993342116
· 쪽수 : 496쪽
· 출판일 : 2008-12-20
책 소개
목차
1부 런던에서
2부 건지섬에서
역자 후기
리뷰
책속에서
그러자 엘리자베스가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한 걸음 앞으로 나섰습니다. 엘리자베스는 키가 크지 않기 때문에 총구가 바로 그녀의 얼굴을 겨누고 있었지만, 엘리자베스는 눈도 깜빡이지 않았습니다. 마치 총을 보지 못한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녀는 순찰대장에게 다가가더니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얼마나 엄청난 거짓말이었는지! “통행금지를 어기게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우리는 건지 섬 문학회 모임에 참석했던 길인데, 오늘 저녁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독일식 정원」이라는 소설에 대한 토론이 너무나 즐거웠기 때문에 시간이 가는 것도 몰랐습니다. 정말 훌륭한 작품이에요― 혹시 당신도 읽어 보셨나요?”
우리는 아무도 엘리자베스의 말을 거들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도움을 준 것은 독일군 순찰대장이었습니다. 그는 엘리자베스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던 것입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사람입니다. 순찰대장은 우리 이름을 적더니 다음날 아침에 사령본부에 출두해 달라고 정중하게 명령했습니다. 그러고는 고개 숙여 경례하면서 좋은 저녁 보내라는 인사까지 했습니다. 엘리자베스가 최선을 다해 정중한 자세로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나머지 우리들은 서두르지 않으려 애쓰면서, 조금씩 뒤로 물러섰습니다. 저는 술 취한 부커를 질질 끈 채로 재빨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돼지구이 저녁식사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 59~60쪽 중에서
예를 들어, 그들은 늘 통행금지 시간을 변경했습니다― 저녁 여덟시에서 아홉시로, 그러다가 심술을 부려야겠다 싶으면 다섯 시로 정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친구를 방문할 수도 없었고 가축을 돌볼 시간도 없었습니다.
처음에 우리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여섯 달 후면 독일군도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그 기간은 계속 늘어났습니다. 식량은 점점 귀해졌고 곧 땔감이 사라졌습니다. 낮에는 힘들게 일하느라 칙칙하게 보냈고, 밤에는 할 일이 없어서 컴컴하게 지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영양결핍으로 핼쑥해지고 이 상황이 과연 끝날 것인가 하는 걱정으로 창백해졌습니다. 우리는 책과 친구들에게 의존했습니다. 그것만이 우리에게 다른 부분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엘리자베스가 종종 읊던 시가 있습니다. 제목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이렇게 시작되는 시였습니다. ‘지금껏 태양을 즐겨온 것이 사소한 일이란 말인가. 봄이면 마음 가볍게 살아 왔고, 사랑을 했고, 생각을 했고, 일을 했고, 진정한 우정을 쌓아나갔던 것이 과연 사소한 일이란 말인가?’ 물론 사소한 일이 아니죠. 지금 엘리자베스가 어디에 있든지, 그녀가 이런 마음을 간직하고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1944년 말이 되자, 독일군이 몇 시부터 통행금지를 정하더라도 전혀 상관이 없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섯 시쯤이면 온기를 보존하기 위해서 잠자리에 누웠습니다. 1주일에 양초 두 자루를 배급 받았는데, 그나마 한 자루로 줄었습니다. 책을 읽을 불빛도 없는 어둠 속에서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은 정말 진저리나는 일이었습니다. - 118~119쪽 중에서
롤프는 술만 마시면 허풍쟁이가 되는 놈인데 어느 날 술집에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떠벌이더군요. “여자들은 시를 좋아한다니까. 감미로운 말을 속삭이기만 하면 녹아버리지. 풀밭 위에 기름을 떨어뜨린 것처럼 말이야.” 그게 어디 숙녀에 대해서 할 말입니까? 그 순간 저는 알아차렸습니다. 롤프가 미망인 후버트 부인을 원하는 것은 저처럼 그녀가 좋아서가 아니라, 그녀 소유의 목초지에 자기 소떼를 풀어놓기 위해서라는 걸 말이죠. 그래서 저는 ‘좋아, 후버트 부인이 시를 좋아한다면, 나도 시를 몇 편 찾아봐야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
그 일 이후로 저는 이 ‘시’라는 것에 뭔가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문학회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잘한 결정입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윌리엄 워즈워스의 작품을 읽을 수 없었을 것이며, 아직도 워즈워스를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었을 테니 말입니다. 저는 워즈워스 시를 여러 편 외웠습니다.
여하튼 저는 마침내 미망인 후버트 부인의 손을― 사랑스러운 낸시의 손을 잡게 되었습니다. 그 후 어느 날 저녁, 저는 그녀와 함께 해안절벽을 따라 걷다가 그녀를 보며 이렇게 말했지요. “저길 봐요, 낸시. 온화한 하늘이 바다를 덮고 있으니― 위대한 절대자가 잠이 깨는 소리를 들어보라.(워즈워스의 시 중 한 구절)” 그러자 낸시는 나의 키스를 허락했던 것입니다. 그녀는 지금 저의 아내입니다. - 130~132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