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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88993506068
· 쪽수 : 264쪽
· 출판일 : 2009-02-01
책 소개
목차
수필집 문을 열며 - 이 행복한 세상 무엇을 따로 숨길까 | 04
제1부…저녁뜸
숙직 | 15
담뱃값이나 조금 부치우 | 19
누(gnu)떼 | 24
숟가락에 대하여 | 29
일편단심 | 34
초가을 그 시간 | 38
수통골 | 42
가을모기와나 | 46
간이역 오무로에서 | 51
정읍사 | 55
가을단풍 | 59
대청소 | 63
제2부…붉은 빛 감성
옹이진 지팡이 | 69
화장기 | 73
감기 끝 무렵 | 77
걸레 | 81
밤기차 타고 여수행 | 85
그건 아니지 | 91
돌연 시월의 아침 | 95
싱큼한 초대 | 100
폐허의 옛그림자 | 104
아들의 빈방에서 | 108
제3부…달차근한 소리
복사꽃 | 115
밥알 하나 주우며 | 119
밤나무 추억 | 123
마음으로만 간직한 개 | 128
빨래터 이야기 | 132
개구리 울음소리 | 136
막걸리 | 140
안골농장 | 144
서울은 비 | 155
두부 한 모 | 159
기회의 또 다른 의미 | 163
제4부…내 마음의 분신
경계인 | 171
그릇·1| 176
그릇·2| 180
슬픔에 대하여 | 185
알면서도 모르는 체 하기 | 190
수필가 | 194
추억의 사진첩에서 | 202
싱가포르의 낮과 밤 | 214
Letitbe | 221
술꾼 | 225
열기 속으로 | 230
수필답지 않은 생각 | 234
묵은 때 | 239
묵은 지 | 243
아들의 입영 | 247
똥개 | 252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 257
저자소개
책속에서
…… 특히 이쯤 황혼은 입 안에 스르르 단맛이 고일 정도로 곱다. 여름 밤 황혼을 바라보며 립스틱 짙게 바른 여인을 연상한다면 이 어린 시간의 고운 자태는 영락없는 새색시의 발그레한 볼이다. 찾아든 어둠은 으슥하지 않으며 농염하지 않다. 늦가을은 너무도 방긋하여 낙조의 꽃을 연상할 것이지만 이즈음은 흡사 꽃망울을 막 짊어진 것 같은 기대가 숨 쉰다. 그렇게 서서히 엷게 물들이다가는 어느 순간 낚싯줄에 고기 걸리듯 톡 하고 땅거미가 진다.
물들자마자 순식간에 닿는 겨울날의 황혼과는 견줄 것이 아니다. 화해의 실마리가 보이는 듯 꽃망울이 흐르는 듯 말머리가 트일 것만 같다. 황혼이 해찰을 하는 시간에서의 물드는 상념은 이제 막 시작이다. 그 시절은 그 무엇의 느낌으로 살았을까. 추억은 아니더라도 휑하니 뒤를 돌아다보게 된다. 어쩌면 이쯤이 좋은 것은 어린 때부터였을지 모른다. 막 밥에 뜸이 들던 시각이 바로 이때였다. 어머니는 석유풍로의 다 닳은 심지를 올릴 만큼 올려서 그어댄 성냥 불 끝을 빙빙 돌려 겨우 불을 살렸다.
보글보글 끓는 된장국 냄새에 빈 배는 그야말로 땅거미처럼 푹 꺼진다. 나는 늘 그렇게 어머니의 그 따스함을 기대하며 기다렸다. 그래서인지 그 촌지의 시간은 지금도 여전히 이 시각을 꼬박 정시에 알려 준다. 가만 생각해보면 5시 반은 비단 초가을뿐 아니라 어느 때고 늘 초가을의 느낌으로 살았다. 일이 여물고 매듭을 지으려 할 때가 바로 이 시각이며 꾸벅꾸벅 졸다가도 총기가 다시 피는 것도 또 이때다. 명암은 어차피 어긋남 없이 그 누구도 교차한다. 그것은 운명과도 같다. 그러기에 어둠이 채 여물지 않은 이 시각의 분위기는 누구나 소망하는 머물고 싶은 그 어디쯤 삶의 배경은 아닐까. - '초가을 그 시간' 중에서
총기와 권태 그리고 반목이 허물어지는 이 시각. 조금 전까지 만해도 일의 끝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과일의 맛이 들고 곡식이 여무는 때처럼 이 시각은 명암과 냉온이 교차하는 명치끝으로서 달보드레한 붉은 여백이 분명 있다. 격론을 펼치든 흥정을 하든 어느 누구든 슬슬 일을 접고 말을 아낀다. 화해는 아닐지라도 내일의 여지가 있다. 아등바등하는 것들이 그 정도에서 끝이 나는 것을 종종 보아왔다. 혹여 그러한 것이 배고픔을 숱하게 인식하였던 소싯적 아쉬움 때문은 아닐까. 아니 그 목마름이 아닐까.
분명히 어머니의 느낌이 그 안에 있다. 배가 고프면 왜 자연 이 나이에도 집과 어머니가 사르르 떠올려지는가. 이 시각엔 누구든 바쁘고 주어진 시간이 짧다. 하루를 어찌 정리할 것인가 하는 숙제만 대부분 남는다. 이 시각처럼 생각을 많이 하는 때도 없다. 내일은 어찌할 것인가 생각해보는 시각이며 또한 어쩔 수 없이 다가오는 어둠을 생각해봐야만 하는 시각이다. 냉온과 명암의 구별로서 조금은 철이 든 것 같은 5시 반 이쯤의 시각.
문득 이 시각이 지금의 내 나이가 아닌가 싶어진다. 나는 이 시각의 저물지 않은 기대로서 내일을 또 맞는 것인가. 많은 것들이 곱다 여겨지는 이쯤이라면 여전한 삶의 기대라 해두고 싶다. 여물어가는 삶의 풍경이 좋고 그 동화 속에 머무는 상념이 그윽하여 그저 고맙다. 하루의 일과가 매듭을 짓는 마음으로 기우는 것이 또 좋으며 그렇게 이 시각엔 그 기대감으로 여전히 배가 고프다. 그러기에 나는 이쯤 머무는 상념으로 선선히 매듭을 자근자근 풀며 살고 싶다. 이왕이면 초가을 날로 해서 그렇게. - '초가을 그 시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