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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외국에세이
· ISBN : 9788994013565
· 쪽수 : 552쪽
· 출판일 : 2012-10-20
책 소개
목차
추천사
프롤로그
1부. 천 가지 일들
1. 천 가지 일들
2. 이별
3. 엄청난 짐
2부. 떠나는 길
4.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 제1권
5. 떠나는 길
6. 사면초가
7. 숲 속에 남은 단 한 명의 여자
3부. 빛의 길
8. 까마귀 이야기
9. 정확한 길 찾기
10 빛의 길
4부. 와일드
11. 내 안의 나
12. 지금까지의 길
13. 나무들이 쌓여 있는 곳
14. 와일드
5부. 빗물
15. 빗물
16. 마자마 산
17. 본래의 모습으로
18. PCT의 여왕
19. 공통된 언어의 꿈
미그웨치
리뷰
책속에서
그때 엄마의 이름이 스피커에서 들려왔다. 처방전이 다 준비된 것이다.
“가서 받아와. 가서 네가 누구인지 말하고. 내 딸이라고 말해라.”
나는 엄마의 딸이다. 아니 그 이상이지. 나는 카렌이고 셰릴이고 레이프다. 카렌, 셰릴, 레이프. 카렌셰릴레이프. 평생 동안 엄마의 입을 통해 우리 삼남매의 이름이 한꺼번에 불리는 걸 들어왔다. 엄마는 그 이름들을 속삭였고 소리치기도 했으며 화가 난 듯 쉭쉭거리다가 부드럽게 노래하듯 부르기도 했다. 우리는 엄마의 새끼인 동시에 동지였고 시작이자 끝이었다.
우리는 차를 타면 번갈아가며 엄마 옆자리에 앉았다.
“내가 이만큼 너희를 사랑할까?” 엄마는 그렇게 물어보며 양손을 한 뼘 정도 벌렸다.
“아니오!” 우리는 킬킬거리며 합창하듯 대답했다.
“그럼 이만큼?” 엄마는 같은 질문을 반복하며 그때마다 손을 점점 더 크게 벌렸다. 하지만 아무리 손과 팔을 크게 뻗은들 원하는 대답에 다다를 수 있었을까? 절대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엄마의 사랑은 훨씬 더 컸으니까. 그 사랑은 그렇게 크기나 무게를 가늠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중국의 철학자 노자老子가 쓴 《도덕경》에서는 이러한 사랑이 천 가지에 다시 천 가지를 더한 만큼 수없이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데, 우리 엄마를 보면 그 뜻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큰 소리로 울려 퍼지고 모든 걸 아우르면서도 아무런 장식이 없는 소박한 그런 사랑…….
엄마는 매일매일 자신의 모든 걸 우리에게 쏟아 부었다.
수 폴스에서 미니애폴리스까지는 자동차로 여러 시간이 걸렸다. 에이미는 혹시 내가 모는 트럭이 다시 망가지지나 않을까 싶어 다음 날 아침까지 자기 차를 타고 내 뒤를 쫓아왔다. 나는 라디오도 듣지 않고 내 임신에 대해서만 생각하며 차를 몰았다. 고작해야 쌀알만 한 크기겠지만 그것이 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가장 중요한 부분임을 절감할 수 있었다. 나를 주저앉게 하고 나를 일깨우며 내 몸 전체를 울리는 그것, 임신.
미네소타의 남서부 농장지대 어느 곳에서 나는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어찌나 심하게 울었던지 운전을 제대로 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단지 원치 않은 임신을 해서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다 서러워서, 그래서 울었다. 엄마가 죽고 난 뒤 내 스스로를 망쳐버린 이 더러운 시궁창이 싫어서, 어느새 내 자신의 모습이 되어버린 이 바보 같은 몰골이 싫어서 울었다. 나는 이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이렇게 처참하게 망가진 모습으로 살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
그러다 문득 REI의 진열대에 놓여 있던 여행안내서가 떠올랐다. 표지에 박혀 있던,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거대한 바위산들에 둘러싸인 호수의 사진이 떠오르자 마치 주먹으로 얼굴을 강타당한 듯 무엇인가가 확 깨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계산을 기다리며 줄을 서서 그 책을 집어 들었을 때는 그저 시간을 죽이기 위해 그렇게 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것이 아닌 어떤 징조처럼 여겨졌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바로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미네소타 경계에 이르렀을 때 나는 에이미에게 이제 그만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러나 나는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차를 REI 쪽으로 돌려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 제1권:캘리포니아 편》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와 밤새도록 읽었다. 그후 몇 개월 동안 열두 번도 넘게 그 책을 읽었다. 그사이 자궁에서 쌀알만 한 걸 긁어냈고, 참치를 말려 보관하는 법과 칠면조 고기로 육포를 만드는 법을 배웠다. 기본적인 구급처치 방법을 속성으로 이수하고 우리 집 부엌 싱크대에서 휴대용 정수기 사용법을 연습했다.
나는 변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이 그 계획을 세우는 몇 개월 동안 나를 밀어붙이는 힘이 되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예전 모습을 되찾겠다는 것이었다. 강한 의지와 책임감, 맑은 눈을 가진 사람. 의욕이 넘치며 상식을 거스르지 않는 그냥 보통의 좋은 사람. PCT는 나를 그렇게 만들어줄 터였다. 그곳을 걸으면서 내 인생에 대해 전체적으로 다시 생각해볼 참이었다. 인생을 이처럼 우스꽝스럽게 만들어버린 모든 것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채, 내 의지와 힘을 다시 찾을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여기 이렇게 PCT에 서고 보니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다시 돌아온 것만 같았다. 비록 조금 다른 형태이긴 했지만. 여행 첫날부터 이렇게 똑바로 서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웅크린 채 걷고 있는 모습이라니.
폴이 그리웠다. 내 삶이 그리웠다. 그렇지만 나는 어느 쪽으로도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불륜을 고백한 뒤 폴과 함께 부둥켜안고 마룻바닥 위에 허물어졌던 그 끔찍한 순간이 계속해서 나를 흔들고 괴롭혔다. 그리고 나의 고백이 단지 이혼뿐만 아니라 나를 이런 모습으로 이끌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지금 캘리포니아의 올드 스테이션에 있는 피크닉 테이블에 혼자 앉아 이렇게 아름다운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행복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자랑스러운 기분도 부끄러운 기분도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건 내 모든 잘못된 행동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렇게 여기까지 왔고 제대로 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몬스터 쪽으로 가서 지미 카터가 주었던 담배를 꺼내들었다. 담배를 피우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담배를 꺼내 피크닉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끝에 불을 붙였다. 이제 여행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조금 넘었다. 긴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이제 막 여행을 시작하는 기분도 들었다. 마치 이제야 내가 하길 원했던 뭔가를 막 밝혀내는 기분이랄까. 나는 여전히 가슴속에 구멍이 하나 뚫려 있는 여자였지만 그 구멍은 이제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작아지고 있었다.
나는 담배 한 모금을 머금었다가 내뿜었다. 지미 카터가 그걸 주고 떠나버린 날 아침, 온 세상에서 나보다 더 외로운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일이 기억났다. 그래, 온 세상에서 나보다 더 외로운 사람은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것도 뭐, 괜찮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