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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전 한국소설
· ISBN : 9788994353418
· 쪽수 : 356쪽
· 출판일 : 2014-06-16
책 소개
목차
비 내리는 겨울을 좋아하던 시절에 읽은 책 _ 박상률
희생화
빈처貧妻
술 권하는 사회
타락자
유린
피아노
우편국에서
할머니의 죽음
까막잡기
그리운 흘긴 눈
발
운수 좋은 날
불
B 사감과 러브레터
사립 정신병원장
동정
고향
신문지와 철창
정조와 약가
서투른 도적
연애의 청산
현진건 연보
리뷰
책속에서
빈처
“그것이 어째 없을까?”
아내가 장문을 열고 무엇을 찾더니 입안말로 중얼거린다.
“무엇이 없어?”
나는 우두커니 책상머리에 앉아서 책장만 뒤적뒤적하다가 물어보았다.
“모본단 저구리가 하나 남았는데…….”
“…….”
나는 그만 묵묵하였다. 아내가 그것을 찾아 무엇하려는 것을 앎이라. 오늘밤에 옆집 할멈을 시켜 잡히려 하는 것이다. 이 이 년 동안에 돈 한 푼 나는 데는 없고 그래도 주리면 시장할 줄 알아 기구器具와 의복을 전당국 창고에 들여 밀거나 고물상 한구석에 세워두고 돈을 얻어오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아내가 하나 남은 모본단 저고리를 찾는 것도 아침거리를 장만하려 함이라.
나는 입맛을 쩝쩝 다시고 펴던 책을 덮어놓고 후? 한숨을 내쉬었다.
봄은 벌써 반이나 지내었건마는 이슬을 실은 듯한 밤기운이 방구석으로부터 슬금슬금 기어나와 사람에게 안기고, 비가 오는 까닭인지 밤은 아직 깊지 않은데 인적조차 끊어지고 온 천지가 빈 듯이 고요한데 투닥투닥 떨어지는 빗소리가 한없는 구슬픈 생각을 자아낸다.
“빌어먹을 것 되는 대로 되어라.”
술 권하는 사회
.
“흥, 또 못 알아듣는군. 묻는 내가 그르지, 마누라야 그런 말을 알 수 있겠소? 내가 설명을 해드리지. 자세히 들어요. 내게 술을 권하는 것은 화증도 아니고, 하이칼라도 아니오. 이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오. 이 조선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오. 알았소? 팔자가 좋아서 조선에 태어났지, 딴 나라에 났더면 술이나 얻어먹을 수 있나…….”
사회란 것이 무엇인가? 아내는 또 알 수가 없었다. 어찌하였든 딴 나라에는 없고 조선에만 있는 요릿집 이름이어니 한다.
“조선에 있어도 아니 다니면 그만이지요.”
남편은 또 아까 웃음을 재우친다. 술이 정말 아니 취한 것같이 또렷또렷한 어조로
“허허, 기막혀. 그 한 분자 된 이상에다 다니고 아니 다니는 게 무슨 상관이야. 집에 있으면 아니 권하고, 밖에 나가야 권하는 줄 아는가 보아. 그런 게 아니야. 무슨 사회 사람이 있어서 밖에만 나가면 나를 꼭 붙들고 술을 권하는 게 아니야…… 무어라 할까…… 저어 우리 조선 사람으로 성립된 이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아니 못 먹게 한단 말이오…… 어째 그렇소…… 또 내가 설명을 해드리지. 여기 회會를 하나 꾸민다 합시다. 거기 모이는 사람놈 치고, 처음은 민족을 위하느니 사회를 위하느니, 그리는데, 제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다 아니하는 놈이 하나도 없지. 하다가 단 이틀이 못 되어, 단 이틀이 못 되어…….”
B 사감과 러브레터
셋째 처녀는 대담스럽게 그 방문을 빠끔히 열었다. 그 틈으로 여섯 눈이 방 안을 향해 쏘았다. 이 어쩐 기괴한 광경이냐! 전등불은 아직 끄지 않았는데 침대 위에는 기숙생에게 온 소위 ‘러브레터’의 봉투가 너저분하게 흩어졌고, 그 알맹이도 여기저기 두서없이 펼쳐진 가운데 B 여사 혼자?아무도 없이 제 혼자 일어나 앉았다. 누구를 끌어당길 듯이 두 팔을 벌리고 안경 벗은 근시안으로 잔뜩 한곳을 노리며 그 굴비쪽 같은 얼굴에 말할 수 없이 애원하는 표정을 짓고는 키스를 기다리는 것같이 입을 쫑긋이 내어민 채 사내의 목청을 내어가면서 아까 말을 중얼거린다. 그러다가 그 넋두리가 끝날 겨를도 없이 급작스레 앵돌아지는 시늉을 내며 누구를 뿌리치는 듯이 연해 손짓을 하며 이번에는 톡톡 쏘는 계집의 음성을 지어
“난 싫어요, 난 싫어요. 당신 같은 사내는 난 싫어요.”
하다가 제물에 자지러지게 웃는다. 그러더니 문득 편지 한 장을(물론 기숙생에게 온 ‘러브레터’의 하나) 집어 들어 얼굴에 문지르며
“정 말씀이야요? 나를 그렇게 사랑하셔요? 당신의 목숨같이 나를 사랑하셔요? 나를, 이 나를.”
하고 몸을 추스르는데 그 음성은 분명히 울음의 가락을 띠었다.
“에그머니, 저게 웬일이야!”
첫째 처녀가 소곤거렸다.
“아마 미쳤나 보아, 밤중에 혼자 일어나서 왜 저러고 있을꾸?”
둘째 처녀가 맞방망이를 친다.
“에그 불쌍해!”
하고 셋째 처녀는 손으로 고인 때 모르는 눈물을 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