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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조선사 > 조선시대 일반
· ISBN : 9788994606101
· 쪽수 : 320쪽
책 소개
목차
머리말 “하찮으나 존엄한” 가장자리에서 바라본 조선시대 사람들
1부 조선 관료제의 손과 발
남의 나라 말을 익혀라, 통사(通事)
법집행의 손과 발, 소유(所由)
길 잡고 심부름하던 나라의 종, 구사(丘史)
말을 고치는 수의사, 마의(馬醫)
수학과 계산을 위해 살다, 산원(算員)
2부 궁궐의 가장자리에 선 사람들
국왕의 앞길을 인도하다, 중금(中禁)
인간 삶의 기본, 음식을 다룬 숙수(熟手)
기생인지 의사인지 모를 의녀(醫女)
시간을 제대로 알려라, 금루관(禁漏官)
3부 나랏일에 공을 세워야
호랑이를 잡아라, 착호갑사(捉虎甲士)
목숨을 걸고 뛴다, 간첩(間諜)
말을 바쳐라, 목자(牧子)
바다가 삶의 터전이다, 염간(鹽干)
조운선을 운행하다, 조졸(漕卒)
4부 나는 백성이 아니옵니다
서럽고 서러워라, 비구니(比丘尼)
사람들을 즐겁게 하라, 광대
눈이 멀었으니 미래가 보인다, 점쟁이
놀고 먹는다, 유수(遊手)와 걸인
죽음을 다루는 직업, 오작인(?作人)과 망나니
소를 잡아서 먹고 살다, 거골장(去骨匠)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그런데 통사에게 시험보다 괴로운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사역원에서 그 나라 말만을 쓰게 한 규정이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중국말에 능통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 더구나 말하기는 발음이 매우 중요한데 국내에서만 공부하니 발음이 시원치 않았다. 그래서 국내에서 중국어를 10년이나 공부한 사람보다 사신으로 중국에 두어 달 다녀온 사람이 더 낫다는 평이 있었다.
이런 문제의 근원은 통사들이 사역원에서만 마지못해 외국어를 배우고, 평소에는 우리말을 쓴다는 것이었다. 해법은 하나. 사역원에서 외국어만 쓰게 하는 것. 마치 어학연수원에서 하루 종일 영어만 쓰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 방법이었다.
그리고 제대로 지켜지는지 정기적으로 검사를 했다. 만약 우리말을 쓰면, 한 번부터 다섯 번까지 걸린 횟수에 따라 처벌하엿다. 특히 다섯 번을 위반하면 해임시키고 1년 이내에 다시 등용하지 못하도록 했을 정도로 강력한 규정을 적용했다.
이러니 통사들은 사역원에 출근하기를 싫어했다. 사역원 책임자는 날마다 출근부 이름 밑에 출근 여부를 동그라미로 표시했다. 한 달에 3일 결근하면 데리고 다니는 종을 가두도록 했다. 한 달에 15일을 빠지면 벼슬길에 나가는 시험을 보지 못했다. 1년에 30일 이상 결근자는 시험에 합격하더라도 실제 직책을 받지 못하도록 규정하기도 했다.
구사(丘史)란 일종의 수행원으로, 나라에 소속된 남자종이었다. 즉 공노비에 속한다. 그런데 이들이 왜 사간원 정언 유숭조의 길잡이 노릇을 한 것일까? 나라에 속한 남자종이 수행원이 되는 것은, 고위 공무원이나 국회의원 등에게 국가에서 전용 자동차, 비서 등을 내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신분에 따라 나라에서 내려주는 구사의 수가 달랐다. 세종대에 정한 숫자는 다음과 같았다. 대군은 10명, 정1품은 9명, 종1품은 8명 (중략) 양반의 자제로 관직 없는 자는 1명이었다. 혹 비나 눈이 올 경우에는 개인이 고용한 구사 2명을 더하고, 2품 이상으로 늙거나 병이 들어 교자를 타는 경우에는 역시 개인 구사 6명을, 5ㆍ6품의 대간은 1명을 더하도록 했다. 대간은 국왕의 눈과 귀에 해당하는 중요 직책이라 권위를 세우도록 해준 것이다.
관청에는 관청 소속의 구사가 따로 있었다. 그러나 홍문관의 경우는 없었던 모양인지, 홍문관 관리는 다른 곳의 구사를 빌려 행차했다. 성종대에 정석견(鄭碩堅)은 홍문관 응교(應敎, 정4품)가 되었다. 그런데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구사를 빌리지 않았다. 청렴한 성품 탓이었다. 오직 자신의 앞과 뒤에 종 한 사람씩을 데리고 다녔다. 길 가는 사람들은 그에게 ‘산자관원(山字官員)’이라고 손가락질하면서 비웃었다. 세 사람이 한 줄로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이 마치 ‘山(산)’ 자와 같다고 놀려댄 말이다. 그러나 그는 세간의 비웃음도 가벼이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