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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조선사 > 조선시대 일반
· ISBN : 9788994606255
· 쪽수 : 256쪽
· 출판일 : 2014-03-14
책 소개
목차
서론 현대에 살아 있는 유교적 전통
1장 양반-주자학의 담당자들
양반이란 무엇인가
사회 계층으로서의 양반
2장 재지양반층의 형성 과정
안동 권씨에 대하여
입향조 권벌
유곡 권씨의 형성
재지양반 계층의 성립
3장 재지양반층의 경제적 기반
분재기
권벌가의 경제 기반-노비 소유
권벌가의 경제 기반-농지 소유
4장 개발의 시대
농서의 출현
황무지 개간 방식
민간 농서 『농가월령』의 탄생
농지의 개발과 재지양반층
산간과 해안 지역의 농지 개발
5장 양반의 일상생활
『쇄미록』에 대하여
양반의 일상생활
양반과 노비의 관계
6장 양반 지배 체제의 성립
향안·향소·향약
내성동약과 유곡 권씨
혼인·학연의 관계망
동족집락의 형성
7장 재지양반층의 보수화와 동족 결합의 강화
양반 계층 성장의 종언
상속제도의 변화
상속제도를 바꿔놓은 사회적 배경
족보 형식의 변화
문중 조직의 형성과 동족 결합의 강화
8장 양반 지향 사회의 성립
향리층의 양반 지향
민중의 양반 지향
소농층의 성립
결론 전통과 근대
저자 후기
참고문헌
옮긴이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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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책속에서
권벌 자손들의 경우를 보면, 동보, 동미 형제의 경우 ‘동(東)’이 항렬자가 된다. 그다음 세대에서는 ‘목(木)’이 항렬자로 권동미의 네 아들에게는 ‘목’자를 포함한 한자가 이름에 사용되었다. 그렇지만 그다음 세대가 되면 권동보의 양자인 권래의 아들에게는 ‘충(忠)’자가 항렬자로 쓰이는 데 비해 권동미의 손자들 사이에서는 ‘상(尙)’이 항렬자로 쓰인다. 요컨대 권벌의 증손 세대에서는 공통의 항렬자가 쓰이지 않은 것으로, 동족으로서 의미가 약해진 것을 뜻한다.
그렇지만 대단히 흥미있는 것은 이는 권상충의 손자대, 즉 권벌에서 6대째 세대에서는 권동미의 자손을 포함하여 ‘두(斗)’라는 공통의 항렬자가 다시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권상충의 대에 일단 약해졌던 동족으로서의 결합이 권두추 대에서 다시 강화된 것으로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말해 항렬자가 사용되는 범위는 조선 전기까지는 형제와 사촌 사이에 국한된다. 한국에서는 혈연의 원근을 재는 것으로 일본어의 친등(親等)에 해당하는 ‘촌(寸)’이란 단어를 쓴다. 형제라면 2촌, 종형제라면 4촌이 된다. 권벌 일족도 권래의 대까지는 2촌 또는 4촌의 범위에서 항렬자가 쓰였다.
그런데 동족 경합이 강화되어가는 조선 후기가 되자 전기의 경우보다 매우 넓은 범위에서 항렬자가 나타나게 된다. 권벌 일족의 예에서 보면 권두추 세대에서는 항렬자 범위가 10촌가지 확대된다. 그리고 이 세대 이후 권벌의 자손들 사이에서는 세대마다 공통의 항렬자를 사용하게 된다.
노비는 토지를 소유하거나 빌려서 이처럼 자기 농업을 경영했을 뿐만 아니라, 상행위도 했다. 『쇄미록』에 나타나는 번동이란 상행위에 대해서는 앞에서 소개했는데, 오희문의 남자종인 덕노(德奴)도 이 번동을 했다.
1600년 9월 4일과 10월 9일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보인다. 즉 주인에게 휴가를 얻은 덕노가 면화를 번동하려고 9월 4일에 여행을 떠났는데, 오희문도 이에 편승하여 자기가 구입한 면화의 번동을 덕노에게 부탁하였다. 10월 8일에 덕노는 번동 여행에서 돌아왔는데, 자신의 면화는 전부 팔았지만 오희문이 부탁한 면화는 팔지 못했다며 그대로 가지고 왔다. 이 기사에서 분명히 드러나듯 덕노는 자기의 자금으로 면화를 사서 다른 지역에서 팔아 이익을 남긴 것이다.
덕노는 자기 어머니와 사이가 나빴던 모양으로, 그의 불효로 속을 태우던 오희문이 덕노를 큰 매로 때렸다는 기사가 1594년 4월 16일조에 보인다. 이 기사에서 덕노는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는 것, 달리 말하면 가족을 형성하였음을 볼 수 있다. 노비에게는 이러한 가족의 형성이 그들의 농업 경영과 상행위를 유지하는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쇄미록』에는 노비들의 게으름과 ‘부정(不正)’에 대한 오희문의 불만과 분노를 기록한 것이 무수히 보인다. 노비를 이용한 농사일의 낮은 효율, 시장에서 사고팔 때 생기는 상품의 감소, 가격의 허위 보고 등 오희문에게는 머리 아픈 일이 연속되었다. 이런 게으름과 ‘부정’은 노비 같은 부자유 노동자에게는 필연적인 것인데, 앞에서 소개한 한복과 덕노의 예에서 보듯이 그들도 자기 자신의 경영에는 게으르지 않았다.
다음으로 1682년에 작성된 분재기 (8)을 보면 남녀균분상속 원칙의 해체가 더욱 두드러진다. 분재기 (8)의 내용을 상속자별 상속분으로 나눠보면 [표 6]과 같다. 이에 따르면 이천기를 제외한 네 명의 사위에게는 농지가 일절 분재되지 않으며, 노비도 세 적자가 21명씩 분재받은 데 비해 사위들은 13명의 노비를 분재받았을 뿐이다. 사위 중에서도 유일하게 이천기에게만 농지가 상속된 것은 그가 대대로 빈궁한 집 출신으로 유우(流寓 방랑하다가 타향에서 임시로 몸을 붙여 사는 것)의 신분이라는 특별한 이유 때문이었다.(중략)
한편 매우 흥미로운 것은 분재기 (8)로부터 5년 뒤 작성된 분재기 (9)를 보면 남녀균분상속의 방향으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점이다(표 7 참조). 분재기 (9)에서는 수급액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사위들도 적자 못지않게 노비와 농지를 분재받았다.
1682년에 일단 화희문기가 작성되었는데도 5년 뒤 다시 다른 내용을 담은 화회문기가 작성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 경위에 대해 분재기 (9)에는 아무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추측해보건대 분재기 (8)처럼 『경국대전』의 규정이나 종래 관행과는 크게 다른 분재 방식이 당시 사회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 분재를 다시 시행한 원인이 아니었을까? 결혼이란 말할 필요도 없이 서로 다른 혈연집단이 결합하는 하나의 사회적 형태였으므로 결혼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는 상속제도의 형태도 사회적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한 가문이 사회 관행을 무시하고 자의적으로 상속 형태를 바꾸기는 어렵다. (8)과 (9) 두 분재기의 존재는 17세기 후반 안동 지방에서 남녀균분상속제가 해체되던 과도기적 상황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