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조선사 > 조선시대 일반
· ISBN : 9788994606491
· 쪽수 : 308쪽
· 출판일 : 2018-02-23
책 소개
목차
프롤로그: 보이는 공간에서 보이지 않는 권력과 시대를 읽어내기
1. 고려의 마지막 몸부림
사라졌다 찾은 연복사탑 중창비
공양왕과 정몽주, 반전을 꾀하다
태조유훈, 고려의 미란다와 크레덴다
·훈요십조
한양 순주와 연복사 중수
구언교서, 무너지는 선왕성헌
왕건의 재해석
2. 새 왕조 새 수도 정하기의 여정
한양은 정말 무학대사가 고른 땅일까
설화에 담긴 시대성
왕건이 되고 싶었던 이성계의 꿈
유교 군주 이성계의 독실한 불교 신앙
계룡산에라도 천도하겠다
천도지 답사, 마침내 한양으로
전통의 영향과 퇴조, 그리고 수도의 조건
3. 정도전이 경복궁에 담은 뜻
한양의 밑그림: 종묘와 사직, 궁궐, 시장과 도로
경복궁은 어떻게 구성되었나
임금의 큰 복은 무엇인가: 경복
침전은 편안한 공간인가: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투명한 정치에 대한 갈망: 사정전
‘부지런함’의 근거: 훈요십조와 근정전의 차이
임금의 부지런함은 어떠해야 하는가
政과 正, 德과 得: 정문
4. 굴절, 그러나 연속
왕자의 난, 개경으로의 복귀
다시 한양으로 갈 수 있을까
500년 수도, 개경의 관성
공간의 전환, 그리고 구질서의 해체
아버지의 죽음과 태종의 새로운 공사
·태종에 의해 재탄생한 한양
버릴 수 없는 법궁
새로운 위상을 더하다: 경회루
5. 궁궐의 안팎에 위치한 관서
관서의 위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없던 건물은 왜 만들었나: 도평의사사
문무는 양팔과도 같다: 도평의사사와 의흥삼군부, 융문루와 융무루
문무의 겸비는 왜 중시되었나
학문은 늘 임금의 곁에: 집현전
지식은 널리 보급되어야 한다: 주자소
공과 사의 경계, 편전에 사관이 들어가기까지
권력을 어떻게 승계할 것인가: 동궁
에필로그 : 기획과 현실 사이에서
참고문헌
감사의 말
찾아보기
저자소개
책속에서
좀 더 이해하기 쉽게 근래의 사례를 하나 들어 보겠다. 몇 년 전 아이돌 그룹 멤버 중 한 명이 일베에서 사용되는 개념대로 ‘민주화’라는 용어를 라디오에서 사용했다가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당시 일베에서는 ‘민주화’를 ‘아무 데나 쓸데없이 반대한다’라던가, ‘개개인의 개성을 무시한다’는 등의 개념으로 사용하였는데, 이 멤버는 자신들 그룹에서는 그런 ‘(개성을 무시하는) 민주화’는 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당시 이 사단을 보면서 매우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우리 사회에서 ‘민주’란 늘 ‘타는 목마름으로’ 애타게 외치던 최고의 사회적 가치 중 하나가 아니었던가? 이제 이 용어를 뒤틀어 버림으로써 용어에 담긴 가치를 조롱하며 민주적이지 않은 권력이 자리 잡으려는 것인가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당시 이러한 용어의 조작이 일관된 기획 아래 이루어진 것인지, 자연발생적인 우연들이 겹쳐 일어난 것인지는 모르겠다. 여하간 적어도 이 용어의 조작은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스키너의 분석은 바로 이 시기, 고려 말의 상황에도 적절하게 사용될 수 있다. 연복사 중수에 대한 비판이 거셌던 1391년 5월~6월로 돌아가 보자. 이 시기 연복사 중수에 대한 비판은 김초나 정탁처럼 태조유훈의 권위를 무시하는 방식 외에 태조를 재해석하자는 방향으로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태조를 재해석하자는 후자의 논리는 바로 이 시기 이데올로기 전환의 한 전략으로 볼 수 있다. 태조유훈이라는 강력한 정치적 상징성을 돌파하여 새로운 가치에 기반한 정치체를 구성하고자 한 당대의 유신들은 태조와 태조유훈의 성격을 재해석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성균생원 박초의 상소였다.
그렇다면 주변국들이 조선을 위협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대’의 성의, 즉 진실성을 보이는 것과 함께 만만하게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였다. 이것이 바로 전쟁을 억제할 수 있는 무력이다. 이를 위해 조선 건국자들은 다방면으로 노력하였다. 무기를 고도화하고(화약무기의 제조) 전선을 축조하였으며, 각처의 성곽을 정비하였다. 군사 문제를 담당할 좋은 인재를 뽑기 위한 제도(무과)를 마련하고, 군사 동원과 훈련 체계를 정비하며, 전략 전술을 연습시킨 것은 다 그러한 맥락에 있었다.
이러한 군사적 준비가 영토 확장을 위한 준비, 더 나아가 전쟁까지 불사하는 상태로 이어져야 ‘진취적’이라고 보는 사고는 이제 재검토되어야 한다. 이는 진취적인 것이 아니라 군국주의일 뿐이며, 식민지 시기에 대한 열등감의 잔영일 뿐이다. 자존감은 “내가 알고 보면 센 인간이거든!” 하며 강변하는 데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난 원래 이런 사람인데, 그게 뭐 어때서?” 하는 태도에서 북돋아진다.
그런 점에서 이 시대 관료들의 외교와 군사적인 준비를 단순화하거나 만만하게 보지 않았으면 한다. 당대 동아시아 사회에서 새롭게 들어선 정권들과 비교해 보면 조선의 건국자들은 가장 엘리트 그룹에 속한다. 명 건국 초기에는 엘리트 그룹이 주원장과 함께 했지만 그들은 곧 숙청당하였다. 무사 집단인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의 엘리트들이 상대해야 하는 대상들은 하나같이 만만치 않았다. 명의 주원장은 변덕스러웠고 사실 죽을 때까지도 조선에 대해 신뢰하지 않았다. 일본은 어떠하였나. 왜구를 금압하고 싶어도 금압시킬 주체가 일본에 통일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누구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부터 고민해야 했다. 이러한 온갖 문제를 헤쳐 나갔던 사람들이 조선의 건국자들이다.



















